금납(金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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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8년(숙종 4) 상평통보(常平通寶) 발행 이후 현물로 받던 조세(租稅)나 지대(地代)를 화폐로 바꾸어 거두는 것.

개설

조세(租稅) 금납(金納)은 17세기 이래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을 배경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으며, 1894년에 이르러 근대적인 재정 개혁의 일환으로 제도화되었다. 조선왕조는 건국 직후부터 저화(楮貨) 같은 지폐나 조선통보(朝鮮通寶) 같은 동전을 만들어 유통시켰지만, 그것들은 화폐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곧 퇴장되었다. 대신 미(米)와 포(布)가 교환 수단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특히 면작 지대가 확산되면서 면포(綿布)가 15세기 말 이후 가장 대표적인 유통수단이 되었다. 그 때문에 면포 중에는 유통만을 위한 면포가 생산되기도 하였는데, 이를 추포(麤布)라고 하였다. 추포는 올이 성기어 의복 재료로는 사용할 수가 없었고, 오직 유통에만 사용되었기 때문에 포화(布貨)라고 불리었다. 어떻든, 미포가 16~17세기에 유통수단으로 널리 이용됨에 따라 군역, 공물, 요역 등이 미포로 환산되어 수취되었는데, 그러한 방안을 군적수포제, 사대동, 수미법, 공물작미 등이라 하였다.

그러나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상공업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이 약화됨으로써 민영 상공업이 발전하여 곳곳에 장시(場市)가 개설되었다. 또한 지주제의 발달로 토지의 상품화가 촉진되어 농촌에서는 인삼, 담배, 목면, 약재, 채소 등의 특수작물에 대한 상업적 재배가 성행하였다. 그리고 대동법의 실시로 조세체계가 바뀌고 교환경제가 발달하였다. 이처럼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한 17세기 상황에서 화폐가 필요하게 되었고, 정부에서도 경제정책상 화폐가 필요해졌다.

그리하여 인조대에는 개성을 중심으로 하였지만, 화폐가 주조되어 시범적으로 유통되었고, 그 후 화폐유통론이 정부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 결과 1678년에 이제까지 화폐 기능을 담당하던 미포를 대신해 상평통보(常平通寶)라는 동전이 발행되어 1894년의 갑오개혁 때까지 일반적인 화폐로 유통되었다. 화폐의 유통은 전국 각지의 물산을 상품화시켜 상거래를 촉진시켰고, 이후 상품의 매매나 임금의 지불, 각종 납세, 지대의 납부 등에도 화폐를 사용하게 되었다. 또 동전의 주조 원료인 구리를 캐는 광산[銅鑛] 개발이 활발하였으나, 국내 생산이 부족하자 일본으로부터 적지 않게 수입하여 조달하였다.

내용 및 특징

상평통보가 주조되어 법화(法貨)로 인정받자, 조세 전반에 걸쳐 돈으로 거두는 작전(作錢)의 관행이 나타났다. 정부는 주조 당시에 각양 속목(贖木)과 진휼청 환곡만 작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금납을 적극 추진하기로 하고, 첫 주조 다음해인 1679년(숙종 5)에 작전 규정을 마련하였다. 그 주요한 시행 원칙은 ① 금납은 포납(布納) 조세에 한정하여 미납(米納) 조세에서 허용하지 않고, ② 면포의 작전가는 풍흉·시가에 따라 가감하고, ③ 금납 비율은 현물 재정 운영에 장애가 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정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제한 규정에도 불구하고 조세 금납은 17세기 말기에 동전 유통이 정착되고 유통 지역이 확대됨에 따라 점차 증대되었다. 그리고 18세기 전반에는 그동안 금지되어 있던 미납 조세가 공인되는 지역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전세, 대동세, 군역세, 잡역세 등을 수납하는 데 미납이나 포납 대신 동전으로 납부하는 전납(錢納)이 제도화되었다. 생산과 매득이 용이하지 않은 포납과, 조운에 의한 원거리 수송의 어려움이 많은 미납의 한계 때문에 전납은 확대되지 않을 수 없었다. 편리성과 반봉건성이라는 장점 때문에 전납이 확대되었던 것이다.

매년 수십만 냥에서 백만 냥을 헤아릴 만큼 조선 정부에 유입되는 각종 조세 금납량도 급증하였다. 조세 금납 전개에 새로운 계기를 부여한 것은 균역법이었다. 그렇다고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농민들이 화폐 구득을 위해 생산물을 싸게 내다 파는 피해가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영조는 세 차례나 조세 금납제를 폐지하고 순목령(純木令)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곧 동전 주조는 재개되어 확대되고 조세 금납은 확산 일로에 들어가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수백만 냥에 이를 정도였다.

변천

동전 주조 이후 조세 금납이 무한정 확장되기만 했거나, 또 100% 단행되었던 것은 아니다. 전국적 시장 통제가 미숙한 상태에서 높은 금납율은 농민들의 화폐 구득은 물론이고 중앙관부의 재정 운영과 서울의 곡물과 포목 수급 상황을 어렵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조세 금납은 18세기 말을 분기로 한계에 이르렀다. 조세의 금납 비율을 보면 다음과 같다. 18세기 말 『부역실총(賦役實總)』을 분석한 연구에 의하면, 당시 중앙의 주요 관서의 조세 수입과 동전의 비율이 평균 26.5%였는데 최고 기관 균역청(均役廳)은 83%였고 최저 기관 진휼청은 4% 수준이었다. 1807년(순조 7) 한 해에 선혜청(宣惠廳)의 경우 총수입의 25%가 화폐 조세였으며, 호조(戶曹)의 경우 25%, 균역청의 경우 75%에 이르렀다. 대표적인 재정 기관인 호조와 선혜청의 1년 수입 가운데 동전 비율은 양쪽 모두 18세기 중엽까지 전체 수입의 20% 미만,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중엽에는 25~30% 수준에서 등락을 보이고 있다.

금납에 따른 여러 가지 문제도 발행하여 지주·상인·청부업자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반면에 농민들은 화폐를 마련하기 위해 생산물을 싸게 파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것은 화폐의 수요와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여 형성된 전황(錢荒)이라는 돈 가뭄에 의해 발생하였다. 관리들은 이때를 이용하여 이무(移貿)나 작전이라 하여 물가의 저가 시기나 지역에서는 물건으로 징수하고, 반대로 고가 시기나 지역에서는 화폐로 징수하여 차액에 따른 이익을 보았고, 또는 그것을 이용하여 물건과 화폐를 교환하는 수법으로 이익을 보기도 하였다.

1894년에 개화파에 의해 추진된 조세 금납화는 이전부터 전개되어 온 금납이 제도적으로 완결된 형태이다. 개화파들은 당오전(當五錢)을 혁파하고 신식화폐발행장정을 제정하며 금납화를 비롯한 재정 개혁을 통해 봉건적 조세체계를 개혁하고 재정의 일원화를 꽤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금융기관을 적절하게 정비하지 못함으로써 납세를 위한 화폐 획득 과정에서 농민들은 불가피하게 쌀을 내다 팔게 되었다. 이는 미곡 수출을 증대시킴으로써 국내 미가의 앙등과 농촌 사회의 분해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의의

금납은 화폐경제의 발전에 따라서 나타나고, 또 그것을 자극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봉건적 질서를 타파하는 데에 일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농촌 사회를 상품경제에 강제로 편입시키는 동시에 일본에 미곡 수출을 촉진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참고문헌

  • 원유한, 『조선후기 화폐사연구』, 한국연구원,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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