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변초면(極邊初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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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북방 여진족과 남쪽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국경이나 해안의 제일선 지역을 일컫던 말.

개설

극변초면이란 여진족과 왜구 등 외적의 침입이 잦았던 한반도 북부 국경 지대와 남부 해안 지역을 말한다. 세종 때에 극변초면에 연대를 높이 쌓고 봉졸을 두어 밤낮으로 정찰하게 하는 규식을 마련하였다.

내용 및 특징

한반도 북부 국경 지대와 남부 해안 지역은 여진족과 왜구 등 외적의 침입이 잦았던 국방 수비에 중요한 곳으로 극변초면이라 칭하였다. 극변초면의 운영 상황은 1437년(세종 19)에 의정부에서 올린 계문(啓文)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당시에 각 도의 극변초면 중 봉화가 있는 곳에는 연대(煙臺)를 높이 쌓고, 근처에 사는 백성 10여 명을 모아 봉졸(烽卒)로 삼고 세 명씩 번(番)을 서도록 하였다. 각 번은 모두 병기를 지니고 밤낮으로 정찰[偵候]을 했는데, 각 번은 5일 만에 교대하였다(『세종실록』 19년 2월 19일).

또한 여진족의 침입이 잦았던 북부 국경의 봉수군이 봉화를 제때 올리지 않으면 엄히 벌하여 기강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실제로 1703년(숙종 29)에 남병사(南兵使)김중기(金重器)는 단천(端川)의 봉대군(烽臺軍)이 궐직(闕直)하여 봉화를 끊었다 하여 효시(梟示)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를 감하여 곤장을 치고 극변의 군대에 편입시키도록 하였다. 아울러 관리 감독을 소홀히 한 해당 읍의 수령도 영문(營門)에서 곤장을 치게 하였다(『숙종실록』 29년 5월 18일).

참고문헌

  • 김주홍, 『조선시대 봉수연구』, 서경문화사, 201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