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지정(橘智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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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강호시대의 대마도주 종의지의 가신.

개설

일본 강호시대(江戶時代) 전기 대마도주 종의지(宗義智)의 가신(家臣)으로, 일본 명은 정수미육좌위문(井手彌六左衛門)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일 국교회복을 위해 종의지의 명을 받아 1600년(선조 33) 4월 조선에 강화사절로 파견되었으며, 조선인 포로를 송환하였다. 그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국교회복 교섭을 위해 조선에 건너와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였으며, 1607년과 1608년에도 파견되어 기유약조(己酉約條)의 체결을 비롯하여 조선과 일본 간의 국교회복기에 중요한 교섭을 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1609년(광해군 1) 조선으로부터 수직인(受職人)이 되었다.

가계

미상

활동 사항

임진왜란 이후 조일 국교회복을 위해 종의지의 명을 받아 1600년(선조 33) 4월 조선에 강화사절로 파견되었으며, 조선인 포로를 송환하였다. 그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국교회복 교섭을 위해 조선에 건너왔다(『선조실록』 34년 12월 29일).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사망한 뒤, 덕천가강(德川家康)은 가등청정(加藤淸正)을 중심으로 한 반대세력을 관원[關ヶ原] 전투에서 물리치고 전국의 패권을 장악한 후 1603년 지금의 동경(東京)인 강호(江戶)에 막부를 개설하였다. 덕천가강은 막부의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고, 권위를 높일 목적으로 조선의 통신사 파견을 원하였다. 그래서 조선과의 외교창구 역할을 맡고 있던 대마도의 종씨(宗氏)에게 조선 측과 통신사 재개를 논의하도록 명령하였다.

덕천가강의 명을 받은 대마도주 종씨는 국교회복을 위해 빠른 시일 안에 조선에서 통신사를 파견해 줄 것을 재촉하는 사자를 조선에 파견하였는데, 당시 귤지정은 강화사절로 여러 차례 조선에 건너와 일본에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였다. 1604년 4월 그는 부산에서 역관박대근(朴大根)과 협의하였는데, 당시 조선 측에서는 국교회복을 위한 두 가지 조건을 일본에 제시하였다(『선조실록』37년 3월 15일). 첫째 조선에 먼저 덕천가강의 국서(國書)를 보낼 것, 둘째 임진왜란 당시 조선 왕의 능을 파헤친 범인[犯陵賊]을 체포하여 조선에 보낼 것이었다. 이는 조일 국교회복의 전제는 일본에서 먼저 강화를 요청하는 형식이어야 하며,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한 사죄의 뜻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의사를 피력한 것이었다. 결국 1606년(선조 39) 3월 두 가지 조건이 일본 측(대마도)에서 전달되면서 이듬해인 1607년(선조 40) 제1차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가 일본에 파견되었다. 한편, 귤지정은 1607년과 1608년에도 파견되어 기유약조(己酉約條)의 체결을 비롯하여 조선과 일본 간의 국교회복기에 중요한 교섭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1609년(광해군 1) 조선으로부터 수직인이 되었다. 수직인은 외교상의 공로자 등에 대하여 조선 조정에서 관직을 지급하고, 아울러 사선(使船)의 파견과 접대 내지 무역을 허용한 자를 말하며 그들이 파견하는 사선을 수직인선(受職人船)이라고 한다.

『변례집요』에 따르면, 귤지정은 1608년 3월 승려 현소(玄蘇)·유천경직(柳川景直)과 동행하였는데, 당시 그의 도항 명목에는 ‘도주차왜(島主差倭)’라고 되어 있다. 이때의 차왜 파견 목적은 기유약조의 강정과 사절의 한양 상경을 요청한 것이었다. 또한 1610년 10월에도 그는 ‘도주차왜’로 조선에 파견되어 왔는데, 이때 조선후기 임시사절을 의미하는 ‘차왜’라는 말이 처음 나타난다.

『동사록(東槎錄)』에 의하면 1624년 10월 귤지정은 아들과 함께 조선에 와서 통교하고 있었으며, 『세선정탈승록(歲船定奪勝錄)』에는 1636년 이후 귤지정과 아들이 수직한 후 한 번도 오지 않았다고 하였다. 즉 이 시기가 되면 수직은 받았으나 조선에 도항하지 않는 자들도 빈번히 나타났던 것이다.

참고문헌

  • 『변례집요(邊例集要)』
  • 한문종, 『조선전기 향화·수직왜인 연구』, 국학자료원, 2001.
  • 中村榮孝, 『日鮮關係史の硏究』 下, 吉川弘文館, 1970.
  • 田代和生, 『日朝通交貿易史の硏究』, 創文社,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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