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피계공인(狗皮契貢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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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왕실에 진상하거나 대청외교에 쓰이는 가죽 제품을 조달하던 청부상인.

개설

조선후기에 대동법을 시행하면서 정부의 물자를 조달하는 데 참여하는 공물주인이 확대·분화되었다. 대동법 시행 초기에는 정부관서에 속한 각사주인(各司主人)이 선혜청으로부터 공물가를 받아 소속된 관서에 납입하였으나, 대동법을 6도에 시행하면서 왕실과 정부관서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뿐 아니라 왕실에 정기적으로 올리는 진상물 또한 공물주인을 통해 사서 바치는 이른바 경공화(京貢化) 경향이 확대되었다. 이에 서울에서 전(廛)과 계(契)를 창설하여 특정 물품의 조달과 역을 전담하는 상인층이 나타났는데, 구피계인(狗皮契人)이나 관동방물계(關東方物契) 등이 그러한 부류였다. 구피계공인(狗皮契貢人)은 명칭은 구피계이지만 각종 가죽 물품을 왕실에 바치는 한편, 중국에 해마다 공물로 보내는 질 좋은 가죽 제품을 바치는 역을 지던 자들을 말하였다.

담당 직무

동물의 가죽과 털은 의복과 장신구·신발·방석뿐 아니라 방한용 군복과 무기[弓矢]·말안장 등을 제작할 때에도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특히 조선에 온 일본 사신에게 답례품[回賜物]으로 주거나 중국 사행에 방물(方物)·세폐(歲幣)로 보내는 호표피(虎豹皮)·청서피(靑鼠皮)·수달피(水獺皮) 등을 확보하려면 질 좋은 가죽이 정기적으로 상납되어야 했다. 또 왕실 가족의 신발과 방석, 이엄(耳掩)을 만드는 데 쓰이는 서피와 구피도 진상물로 바쳐졌다.

조선전기에는 이러한 가죽 제품을 군현에 분정(分定)하여 이를 매년 중앙관서에 공물로서 상납하는 방식을 취하였는데(『성종실록』 8년 6월 24일), 산림이 우거진 함경도와 평안도에 상대적으로 분정되는 비율이 높았다. 특히 왕실에 진상하거나 외교용으로 쓰이는 호표피는 감영·병영·수영에 분정하여 예물로서 바치게 하였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대동법을 시행하면서 지방에 분정해 쓰던 각종 피혁물을 조달상인을 지정하여 사서 쓰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특히 구피계에서 조달하는 방물은 본래 제도 감사와 병사·수사가 왕실에 진상하거나 세폐방물로 중국에 진헌하기 위해 현물로 바치던 것이었다.

『만기요람(萬機要覽)』의 대동작공(大同作貢) 조에, “가죽값[皮物價]은 1713년(숙종 39)에 삼남(三南)의 감영·병영·수영의 방물 중 가죽을 경공(京貢)으로 하여 구피계에 소속시키고, 원공물가(元貢物價)와 물건을 봉해 싸는 데 드는 비용은 그 읍의 규례에 따라서 쌀·무명·돈으로 상납하게 한다.”는 내용이 있다. 이를 통해 구피계는 삼남에 대동법 시행이 완료된 1678년(숙종 4) 이후부터 1713년에 이전에 설립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구피계인 자체가 외방진상이 경공화되는 과정에서 창설된 조달상인임을 알 수 있다.

『만기요람』의 선혜청 57공(貢)에 구피계공인이 조달하는 피혁물은 녹피(鹿皮)·장피(獐皮)·저피(猪皮)·표피(豹皮)·호피(虎皮)·수달피·세폐녹피(歲幣鹿皮)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이 선혜청으로부터 받는 공물가는 대략 3,870석 9두 2승으로 책정되었다.

변천

18세기에 구피계공인은 삼남에서 진상하는 피물뿐 아니라 강원도의 피물까지 조달 범위를 확대해 갔다. 『비변사등록』에 따르면 1786년(정조 10) 1월, 연해 송상(松商)이 도고(都賈)들과 짜고 동해 연안에서 나는 수달피를 밀무역함으로써 구피계인의 조달역에 피해를 입히는 사례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피계인은 고종대까지 조달역을 계속해 나갔다. 1882년(고종 19)까지도 구피계에 추가로 요구한 피물의 값을 올려 주도록 호조와 선혜청에 당부하는 의정부의 보고를 통해 이를 짐작할 수 있다(『고종실록』 19년 1월 8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도지정례(度支定例)』
  • 『공폐(貢弊)』
  • 『만기요람(萬機要覽)』
  • 김동진, 「16세기 삼남의 虎豹皮 除役과 防納의 위상」, 『지방사와 지방문화』 16,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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