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이겸(具以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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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41년(영조 17)∼1787년(정조 11) = 47세.] 조선 후기 영조~정조 때의 무신. 행직(行職)은 금군별장(禁軍別將)이다. 자(字)는 군실(君實)이다. 본관은 능성(綾城)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병조 판서(判書)와 중추부 지사(知事)를 지낸 구선복(具善復)이다. 생부는 공릉참봉(恭陵參奉)구종엽(具宗燁)이다.

영조 시대 활동

1767년(영조 43) 알성(謁聖) 무과의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7세였다.[<무과방목>]

정조 시대 활동

1777년(정조 1) 충청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되었고, 1778년(정조 2) 함경북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가, 1779년(정조 3) 황해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1780년(정조 4) 우포도대장(右捕盜大將)이 되었고, 1781년(정조 5) 삼도 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거쳐서, 1783년(정조 7) 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되었으며, 1785년(정조 9) 금군별장(禁軍別將)에 임명되었다.

1779년(정조 3) 정조의 후궁 원빈홍씨(元嬪洪氏)가 소생 없이 갑자기 죽자, 원빈홍씨의 오빠인 홍국영(洪國榮)은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恩彦君)의 아들 이담(李湛)을 죽은 원빈의 양자로 삼았다. 이후 상계군(常溪君)에 책봉되었으며, 한때 왕의 후계자로 추대되었으나, 이것이 화근이 되어 역모로 몰리면서 1786년(정조 10) 결국 자살하였다. 게다가 그 해에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죽고 또한 문효세자의 생모(生母)이자 당시 임신 중이던 의빈성씨(宜嬪成氏)가 잇따라 죽는 일이 발생하자, 왕대비가 빈청(賓廳)에 언문 전교를 내려, 이들의 죽음에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다며 역적의 토벌을 주장하는 한편, 그 주장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탕약과 수라를 폐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 일로 구이겸은 아버지 구선복과 함께 국문(鞠問)을 받았다. 아버지 구선복은 이 역모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면서, 그해 12월 처형되었고, 구이겸은 제주(濟州)에 위리안치 되었다가, 1787년(정조 11) 1월 9일 사형에 처해졌다. 1873년(고종 10) 신원(伸寃)이 회복되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영평군(永平郡) 일동면(一東面)에 있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일성록(日省錄)』[정조]
  • 『무과방목(武科榜目)』
  • 『풍서집(豐墅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