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성헌(九成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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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서북쪽 끝단에 있었던, 현 석조전 부지에 위치한 2층 규모의 서양식 건물.

개설

구성헌(九成軒)은 덕수궁에서 고종이 외국 사신을 접견한 양관 건물이다. 고종은 1896년(고종 33) 2월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여 머물면서 정동에 위치한 경운궁을 수리하도록 하였다. 1897년(고종 34) 2월에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함으로써 경운궁은 새로운 궁궐로 역할을 시작하였다.

구성헌은 1897년에 사바틴([士巴津], A.I. Sabatin)의 설계로 건립되었다. 1904년(광무 8)에 사바틴의 설계로 건립되었다고 알려진 돈덕전(惇德殿)과 외관이 매우 비슷하다. 구성헌은 정면에 6개의 아치를 형성하고 측면에 5개의 아치를 형성하여 베란다를 갖추었다. 벽돌을 이용하여 조성한 아치의 모습은 돈덕전의 아치와 비슷하다.

구성헌을 비롯하여 돈덕전과 석조전(石造殿) 등은 서양의 건축 양식에 베란다를 갖춘 콜로니얼 건축 양식 건물이다. 구성헌은 석조전의 뒤편에 있었으나, 석조전 완공 무렵에 철거된 것으로 여겨진다.

위치 및 용도

구성헌은 덕수궁 서북쪽 끝단에 있었다. 준명당(浚明堂)의 서북쪽이며 1910년(융희 4)에 완공된 석조전의 위치이다. 구성헌은 건립 초기에는 대한제국 황제가 외국 사신을 접견하는 건물이었으나(『고종실록』 36년 11월 14일), 돈덕전 건립 이후에는 황태자가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구성헌을 사용한 기록은 1899년(광무 3) 7월부터 1907년(융희 1) 9월까지 확인할 수 있다. 구성헌에 대한 첫 기록은 1899년 7월 11일에 궁중 고문관 뺄스가 알현을 청하니 구성헌에서 4시 반에 만나기로 한 것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궁내부안(宮內府案)』에 수록된 『독립신문(獨立新聞)』 1899년 10월 20일자에는 구성헌과 대관정(大觀亭)에서 각국의 공사와 영사가 만나는 행사를 전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구성헌의 쓰임은 변하게 되었다. 1901년(광무 5)에 돈덕전이 규모 있게 건립된 이후에는 사신의 접견과 신하를 만나는 일들이 돈덕전에서 이루어졌다. 구성헌은 이후의 기록으로 볼 때, 황태자가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대한제국 관보(官報)』 1907년 9월 30일자에 “황태자께옵서 10월 1일 상오 11시 30분에 구성헌에서 출어하사 고등학교와 무관학교를 어순람하옵시고, 동일 하오 4시 30분에 환어”할 예정임을 전하는 소식이 실렸다. 이때 황태자는 구성헌에서 외출하여 다시 구성헌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이로써 당시 구성헌은 황태자가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변천 및 현황

구성헌은 1897년에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할 때 건립되어 외국 사신을 접견하고 신하들을 만나는 건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901년에 돈덕전이 건립되어 외국 사신의 접견 장소로 사용되면서 구성헌의 사용이 줄어들었다. 1910년에 구성헌 근처에 영국 건축가 하딩(J. R. Harding)에 의해 설계된 석조전을 대규모로 건립하면서 구성헌이 철거되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형태

구성헌은 1899년 3월에 아펜젤러(H. G. Appenzeller)가 촬영한 2점의 사진을 통해 그 형태를 볼 수 있다. 하나는 미국 공사관과 영국 공사관을 촬영한 사진인데, 오른쪽 끝단에 구성헌의 2층 측면 모습이 세밀히 보인다. 측면에 5개의 아치가 형성되었으며 그 위로 박공을 갖춘 지붕의 모습이다. 아치는 돈덕전의 형태와 유사하다. 1902년(광무 6)~1903년(광무 7)에 중층의 중화전(中和殿)을 촬영한 사진에서는 중화전 뒤편으로 구성헌의 정면 모습이 담겨 있다. 2층 규모로 1층과 2층에 각 5개의 아치가 형성되었는데, 돈덕전과 같이 외관에 아치를 형성한 베란다를 둔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궁내부안(宮內府案)』
  • 「아펜젤러가 촬영한 각국 공사관 주변 모습」(배재대학교 박물관 소장)
  • 김정동, 『고종황제가 사랑한 정동과 덕수궁』, 발언, 2004.
  • 안창모, 『시대의 운명을 안고 제국의 중심에 서다. 덕수궁』, 동녘,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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