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선복(具善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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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18년(숙종 44)∼1786년(정조 10) = 69세.] 조선 후기 영조~정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병조 판서(判書), 중추부 지사(知事)이다. 자(字)는 사초(士初)이다. 본관은 능성(綾城)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황주진 병마첨절제사(黃州鎭兵馬僉節制使)와 경기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지낸 구성필(具聖弼)이다.

영조 시대 활동

1738년(영조 14) 사마시(司馬試)에서 생원(生員)으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1세였다.[<사마방목>]

1748년(영조 24) 황해도 수군절도사에 취임하였으며, 1750년(영조 26)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이후 금위대장(禁衛大將)과 훈련대장(訓鍊大將)을 거쳐서, 총융사(摠戎使)를 역임하였다.

정조 시대 활동

1776년(정조 즉위) 병조 판서(判書)가 되었고, 1778년(정조 2) 형조 판서(判書)에 임명되었다.

1779년(정조 3) 정조의 후궁 원빈홍씨(元嬪洪氏)가 소생 없이 갑자기 죽자, 원빈홍씨의 오빠인 홍국영(洪國榮)은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恩彦君)의 아들 이담(李湛)을 죽은 원빈의 양자로 삼았다. 이후 그는 상계군(常溪君)에 책봉되었으며, 한때 왕의 후계자로 추대되었으나, 이것이 화근이 되어 역모로 몰리면서 1786년(정조 10) 결국 자살하였다. 게다가 그 해에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죽고 또한 문효세자의 생모(生母)이자 당시 임신 중이던 의빈성씨(宜嬪成氏)가 잇따라 죽는 일이 발생하자, 왕대비가 빈청(賓廳)에 언문 전교를 내려, 이들의 죽음에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다며 역적의 토벌을 주장하는 한편, 그 주장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탕약과 수라를 폐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구선복이 이 역모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면서, 그해 12월 처형되었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일성록(日省錄)』[영조]
  • 『일성록(日省錄)』[정조]
  • 『사마방목(司馬榜目)』
  • 『가암유고(可庵遺稿)』
  • 『각사등록(各司謄錄)』
  • 『경모궁의궤(景慕宮儀軌)』
  • 『극원유고(屐園遺稿)』
  • 『보만재집(保晚齋集)』
  • 『봉곡계찰방유집(鳳谷桂察訪遺集)』
  • 『심리록(審理錄)』
  • 『심암유고(心庵遺稿)』
  • 『쌍계유고(雙溪遺稿)』
  • 『죽하집(竹下集)』
  • 『청성잡기(靑城雜記)』
  • 『팔곡집(八谷集)』
  • 『풍서집(豐墅集)』
  • 『하서집(荷棲集)』
  • 『홍재전서(弘齋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