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묘(九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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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황실에서 종묘 제사를 지내고 조상의 신위를 안치하는 장소.

개설

중국의 역대 황실에서 선조들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다. 주나라 제도에 천자는 7묘를 섬긴다고 되어 있으나 왕망(王莽)이 구묘를 건설한 뒤 역대 황제는 대부분 구묘를 세웠다. 명 태조주원장은 고조부 이상은 확인할 수가 없어 남경의 궁성에 4대조의 종묘를 세웠다. 영락제가 북경으로 천도하면서 구묘 역시 북경으로 옮겨 현재의 위치에 건설되었다. 구묘는 앞에 정전(正殿)을 두고 뒤에 침전(寝殿)을 지었는데 침전 안에는 9개의 묘실을 설치하는 방식으로 여러 묘의 신주들을 안치하였다. 영종의 사후 구묘의 묘실이 모두 차게 되니 주원장의 4대조의 신주는 차례로 합사되어 침전 뒤의 사당으로 옮겨졌다. 가정제 즉위 후 부자형제가 1당에 함께 있는 것이 부당하다고 하여 태종 이하도 모두 묘전을 건축하게 하였는데 1536년(가정 15) 준공되었다. 그러나 새로 건설된 구묘는 1541년(가정 20) 큰 화재가 발생하여 8개의 묘전이 모두 불탔다.

조선에서는 가정 연간의 묘전의 건축과 화재 후에 진하사와 진위사를 파견하였다. 특히 구묘에 화재가 발생하자 가정제가 상제와 태조에게 죄를 고하는 상주문을 올리고 내외에 죄를 뉘우치는 조서를 보냈는데 『중종실록』에서도 관련 기록이 남아 있었다. 가정제는 당시의 화재가 새로 중건되었던 묘전의 건설 방식이 선조들의 뜻에 맞지 않아서 일어났다고 여겨 다시 예전의 방식으로 재건하게 하였다. 청대 건륭제는 명의 제도를 계승 확장하여 현재의 체제를 만들었다. 대문은 3개를 내어 가운데는 극문(戟門)으로 하고 제사를 모시는 전전은 11칸으로 하였다. 전전의 뒤편에는 중전과 후전을 세워 누르하치 이하 역대 제후의 신주와 누르하치 이상의 4대 선조를 각각 받들었다(『중종실록』 36년 6월 19일).

위치 및 용도

영락 연간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천안문 동쪽에 위치하였다. 명·청의 황제들이 조상들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다.

변천 및 현황

현재의 명칭은 노동인민문화궁(勞動人民文化宮)으로 청이 멸망한 뒤 1924년 화평공원(和平公園)이라 칭하였다. 1950년 5월 1일 대외에 개방하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참고문헌

  • 『명회전(明會典)』
  • 萬曆重修本 『明會典』 今太廟總圖
  • 신성곤, 「종묘 제도의 탄생-종묘의 공간과 배치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문화연구』 57,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 2014.
  • 王栢中, 「明嘉靖年間的廟制變革問題試探」, 『社會科學戰線』, 吉林省社會科學院, 2001.
  • 鄭天挺,吳澤,楊志玖 主編, 『中國曆史大辭典』 上, 上海辭書出版社, 2000.
  • 趙克生, 「明嘉靖時期的宗廟祭祀改革與廟制變革的相關性——以特享、祫、禘爲中心」, 『明史硏究』, 中國明史學會, 2005.
  • 趙克生, 『明嘉靖時期國家祭禮改制』, 社會科學文獻出版社,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