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군(槐山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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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괴산군에 설치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괴산군(槐山郡)은 조선시대 충청도 충주목에 속한 군이다. 조선 1403년(태종 3)에 지괴주사(知槐州事)로 승격하고, 1413년(태종 13)에 괴산군으로 고쳤다. 15세기에는 445호 인구 1,303명에 불과한 작은 지역이었다. 토지는 3,880결인데, 논은 1/4이 안 되었다. 군정은 시위군(侍衛軍) 66명, 선군(船軍) 137명이었다. 1914년에 충주와 청안 일부를 합병하여 군이 확장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잉근내군(仍斤內郡)이었다. 통일신라 경덕왕 때 괴양군(槐壤郡)으로 고쳤다. 고려 940년(고려 태조 23)에는 괴주(槐州)라고 하였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충주의 임내로 삼았고, 이후에 감무를 파견하였다. 조선에서도 편제를 이어 지괴주사로 하였다가 1413년(태종 13)에 괴산군으로 하였다.

삼국시대와 후삼국시대에 괴산은 고구려·백제·신라가 충돌하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여러 번 전투가 벌어졌고, 대군의 이동로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통일신라가 된 뒤에는 그만한 전략적 가치는 지니지 않게 되었다. 15세기의 공물로는 꿀·가죽·인삼·버섯 등 임산물이 위주였으며, 당시에 자수정이 발견되었다는 기록도 있다(『세조실록』 4년 9월 5일).

조선시대에 괴산군이 산지에 위치하고 인구가 적고 토지도 비좁은 지역임에도 군으로 독립한 이유는 충주에 속하기에는 통행이 불편하고 거리가 있으며, 남부지방에서 충주로 들어오는 교통로상에서 연결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조직 및 역할

수령은 종4품 군수이다. 조선후기에는 주로 음서 출신을 파견하는 지역이 되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를 통한 18세기 통계로 보면 관아에는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 13명, 아전 20명, 지인 15명, 사령 20명, 관노 23명, 관비 25명이 있었다.

변천

이전 시대와 비교해 보면 조선시대의 행정단위에는 변화가 없었다. 19세기까지도 괴산군은 밭이 약 2,280결, 논이 779결로 15세기와 별 차이가 없는 작은 군현이었다. 조선후기에는 12개 면으로 구성되었다. 1696년(숙종 22)에 작성된 병자장적(丙子帳籍)에 의하면 호수는 3,042호, 남자는 5,215명, 여자 4,960명이었다. 갑오개혁 때 추진한 지방제도 개혁의 결과로 1895년(고종 32)에 충주부의 관할이 되었으나 군의 규모는 변함이 없었다(『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1914년의 지방행정구역 통폐합 때 비로소 충주의 감물면과 율지면, 연풍군 일부와 청안군 일부, 청주의 청천면 등을 이속(移屬)받아 괴산군의 규모가 일반 군현 수준으로 확장되었다.

참고문헌

  • 『괴산군지(槐山郡誌)』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