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목(光州牧)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오늘날의 광주광역시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고려 1373년(고려 공민왕 22)에 광주목(牧)이 설치되었다. 조선이 건국한 후 1393년(태조 2)에는 광주(光州)가 전주·나주와 함께 전라도의 계수관(界首官)이 되었다. 1409년(태종 9)에는 광주와 전주·나주·남원이 계수관이 되었다. 같은 해에 광주목이 관할해 오던 2부곡이 광주목의 직촌(直村)이 되었다. 광주목은 1430년(세종 12)~1875년(고종 12)에 다섯 차례 읍격(邑格)과 읍호(邑號)의 변경이 있었다. 그때마다 무진군(茂珍郡)이나 광산현(光山縣) 등으로 읍호가 바뀌었다가 다시 회복되었다. 1455년(세조 1)에 광주목이 전라도 나주도(羅州道)의 중익을 맡았다. 1457년(세조 3)에는 광주가 전라도에는 7진 가운데 하나인 광주진에 속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광주목이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에는 940년(고려 태조 23)에 처음으로 광주로 개칭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무주(武州)를 광주로 부른 것은 그보다 전인 견훤(甄萱)부터라고 보고 있다. 읍격의 강등과 승격을 되풀이하다가 1373년에 다시 광주라 부르고 목(牧)을 두었다. 조선 건국 후에도 이것이 이어졌다.

조선이 건국한 후인 1393년에는 전주·나주와 함께 광주가 전라도의 계수관이 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1409년에 도관찰사윤향(尹向)이 건의하여,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전라도의 현과 향·소·부곡은 거의 모두 본 고을에 합쳐졌다. 무진 즉 광주에 속한 부곡은 양과(良瓜)와 경지(慶指) 두 곳이었다. 두 곳 모두 이 무렵 직촌으로 흡수되었다. 1423년(세종 5)에 광주 대신 장흥이 계수관이 되어 그 뒤로도 이 체제가 유지되었다.

조직 및 역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광산현에 현감과 훈도 각 1인씩 두었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읍격이 1489년(성종 20)에 광산현으로 강등되었을 때를 가리킨다. 현감은 종6품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겸하였다. 훈도는 5백 호 이상인 고을에는 모두 두기로 한 것에 따른 것이다(『세종실록』 12년 1월 21일). 1501년(연산군 7)에 광주목으로 복구되었는데, 정3품 목사와 종5품 판관을 각 1인씩 두었다. 목사는 종3품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를 겸임하였다. 광주목사 밑에 중앙 관제와 마찬가지로 이·호·예·병·형·공 6방을 두었다. 목사 아래 향청(鄕廳)의 향임(鄕任)으로 좌수(座首)와 별감(別監) 등을 두었다. 이들은 6방을 나누어 장악하여 목사의 지방 행정을 보좌하였다. 향임은 대부분 부세의 분배와 징수, 향풍의 교정, 향리의 감찰 등을 맡았다.

목사는 1896년(고종 33)에 모두 폐지되었다. 판관 1인은 이미 1596년(선조 29)에 폐지되었다. 광주목의 판관 부임 시기가 분명한 것에 국한해서 본다면, 1559년(명종 14)에는 2명이었으며, 1564년(명종 19)에 1명, 1566년(명종 21)에 1명, 1570년(선조 3)에 1명, 1574년(선조 7)에 5명, 1581년(선조 14)~1582년(선조 15)에 각 1명씩이었다. 1586년(선조 19)에는 그것이 다시 2명으로 늘었다. 그러다가 1588년(선조 21)은 1명, 1590년(선조 23)~1593년(선조 26)에는 각 1명씩이었으며, 마지막으로 1595년(선조 28)에는 1명이었다. 그리고 제독(提督) 1인이 있었는데, 설치와 폐지를 되풀이하다가 폐지되고 말았다.

변천

광주목의 경우 군현의 영역은 1409년 이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읍격의 승강에 따라 광주목의 읍호가 광산현(光山縣)이라든가 무진군(茂珍郡) 등으로 바뀐 적이 있었다.

『광주읍지』에 따르면 1430~1875년을 통하여 다섯 차례 읍격과 읍호가 바뀌었다. 첫 번째는 1430년(세종 12)이었다. 노흥준(盧興俊)이 목사신보안(辛保安)을 때린 일로 무진군(茂珍郡)으로 강등되었다가(『세종실록』 12년 3월 26일), 1451년(문종 1)에 광주목으로 복구되었다(『문종실록』 1년 6월 7일). 두 번째는 1489년(성종 20)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소개되었듯이 판관(判官)우윤공(禹允功)이 누가 쏘았는지 모르는 화살[流矢]에 맞은 사건으로 광산현(光山縣)으로 강등되었다가, 1501년(연산군 7)에 복구되었다. 세 번째는 1624년(인조 2)이었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도 폐위된 광해군을 받들어 모시려던 역적(逆賊) 김원(金愿)으로 말미암아(『인조실록』 2년 11월 8일) 광산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34년(인조 12)에 복구된 것으로 되어 있다. 네 번째는 1701년(숙종 27)이었다. 무고(巫蠱) 죄인 숙정(淑貞)의 관향(貫鄕)이므로 광산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707년(숙종 33)에 다시 주(州)로 복구되었다. 다섯 번째는 1869년(고종 6)이었다. 어미를 죽인 죄인이 있어서 현감으로 낮추었다가(『고종실록』 6년 9월 23일), 1871년(고종 8)에 복구하였다.

1455년에는 각 도의 내지(內地)에도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인근 고을을 익(翼)에 분속시켰다. 광주를 비롯하여 나주·남평·능성·영암을 전라도 나주도(羅州道)의 중익으로 삼았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7년에 각 도의 중·좌·우익을 폐지하고 거진을 설치하였다. 이른바 진관(鎭管) 체제로 바뀌면서 전라도에는 7곳에 거진이 설치되었는데 광주도 그중 하나이다. 전라도의 광주진에는 담양·장성·진원·창평·화순·동복·능성이 속했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1895년에 8도 체제 폐지와 함께 광주목이 폐지되고 23부가 시행되면서 나주부가 설치되었다. 나주부 밑에는 광주군을 비롯한 16개 군이 있었다. 1896년(고종 33)에 전국 23부를 다시 13도로 개정할 때 전라남도와 전라북도가 분리되었다. 전라남도는 수부(首府)를 광주에 두었으며, 광주군을 비롯한 32개 군과 제주목의 1목으로 편성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대동지지(大東地志)』
  • 『여지도서(輿地圖書)』
  • 『의안·칙령(議案·勅令)』
  • 김정호, 『지방 연혁 연구-전남을 중심으로』, 광주일보출판국, 1988.
  • 박종기,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푸른역사, 2002.
  • 손정묵, 『한국지방제도·정치사연구(상)-갑오경장~일제강점기-』, 일지사, 2001.
  • 이수건, 『조선시대 지방행정사』, 민음사, 1989.
  • 이존희, 『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 연구』, 일지사, 1990.
  • 『광주시사』, 광주직할시사편찬위원회, 1993.
  • 『광주읍지』(광주 관련 국역 고서 제1집), 광주광역시립민속박물관, 2004.
  • 『전라남도지』,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1993.
  • 『전라북도지』, 전라북도, 198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