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제호(光濟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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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시기 도입된 근대적 해군 군함의 하나.

개설

1904년(광무 8) 11월 일본에서 도입한 대한제국의 근대적 군함의 하나로 3인치 함포를 장착하고 해안 경비, 등대 순시 및 세관 감시 등으로 사용하였다. 아울러 우리나라 최초의 무선전신시설을 갖춘 선박이기도 하였다. 을사조약으로 통감부가 설립된 이후, 광제호는 군부가 아닌 탁지부 관세국(關稅局) 소속의 연안세관 감시선이 됨에 따라 군함으로서 역할은 끝나게 되었다.

연원 및 변천

조선 정부는 1876년 개항 이후 여러 차례 근대적 군함을 도입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1881년에는 공채를 모집하면서 군함 도입 계획을 수립하였고, 1893년 최초의 해군사관학교인 해군통제영학당(海軍統制營學堂)이 설립될 무렵에도 조선 정부는 다시금 밀수 방지 등을 위하여 군함을 매입하고자 하였으나 조선의 재정 능력이 없다는 이유 등으로 각국은 회피하였다.

최초로 도입된 근대적 군함은 일본에서 구입하여 1903년 4월 15일 인천항에 입항한 양무호(揚武號)였다. 그러나 이 배는 원래 1888년 영국의 딕슨(R. Dixon)사가 건조한 원양항해용 화물선으로, 1894년 일본의 미쓰이 물산에서 석탄 운반선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구입한 배였다. 이러한 경력의 배를 도입하여 함포를 장착한 것이었으므로 문제점이 적지 않았다. 이와 함께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새로운 군함을 발주하기로 결정하고 1902년 12월 조선해관(朝鮮海關) 총세무사 영국인 브라운(J. M. Brown)이 일본 가와사키조선[川崎造船] 고베 조선소에 일화(日貨) 250,000원에 그 발주를 의뢰하였다. 등대감시 및 수송선 입출항시 세관 순시 및 경비용의 명목으로 발주된 광제호는 1904년 6월 진수되어 시운전을 거쳐 그해 11월 대한제국 정부에 인도되었고, 이후 해안 경비와 등대 순시 및 세관 감시 등으로 사용하였다.

광제호 도입을 계기로 대한제국 정부는 육군만 편제되어 있던 군부(軍部)를 개편하여 해군 편제 마련을 시도하는 등 해군력 확보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의 근대 해군 창설을 견제하고 을사조약을 통하여 통감부를 설립함으로써, 광제호는 군부가 아닌 탁지부 관세국 소속의 연안세관 감시선이 됨에 따라 군함으로서 역할이 끝나게 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에는 조선총독부 통신국(通信局)으로 이관되고 함명도 코사이마루[光濟丸]로 바뀌었다. 1912년에는 민간회사로 넘어가 상선이 되었고 태평양전쟁 중에는 석탄운반선으로 차출되어 사라졌다.

형태

광제호는 전장 220척(66m), 너비 30척, 화물 적재량 540톤, 총 톤수 1,056톤으로 3연성(連成) 레시프로기관 2대를 장착하여 출력 2,483마력으로 최대 속도 14.44노트를 기록하던 당시로서는 상당히 우수한 선박이었다. 광제호는 인천항에 도착한 후 3인치 포 3문을 장착하였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광제호는 우리나라 최초의 무선전신시설을 갖춘 선박으로서도 의미가 있었다. 이 배에는 무선시설 및 선박용 무선통신안테나인 터블렛트 2기의 전신 설비를 갖추고 있어서 인천 일대의 등대 무선통신소 간의 전파 통신을 행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황성신문(皇城新聞)』
  • 국사편찬위원회 편, 『고종시대사』, 국사편찬위원회, 1968~1972.
  • 김재승, 『한국근대해군창설사』, 혜안, 2000.
  • 심헌용, 『한말 군 근대화 연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5.
  • 장학근 편, 『해양제국의 침략과 근대해군의 해양정책』, 한국해양전략연구소,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