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명문(光明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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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에서 왕의 침전인 함녕전 남행각 밖에 있는 외삼문.

개설

광명문(光明門)은 덕수궁 함녕전(咸寧殿)의 남쪽에 있는 삼문이다. 함녕전은 1897년(고종 34)에 덕수궁에 건립된 침전이다. 함녕전의 남쪽에는 행각이 이중으로 조성되어 내삼문을 치중문(致中門)이라 하고 외삼문을 광명문이라 하였다.

1904년(광무 8)에 함녕전에서 일어난 대규모 화재로 덕수궁의 많은 전각이 소실되었다. 이때 광명문도 소실되었으나 그해 12월에 함녕전 재건이 이루어졌으며 광명문도 외삼문으로 재건되었다. 1927년에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일제는 궁궐 건물들의 매각을 전면적으로 실시하였다. 이로써 덕수궁을 가득 메우고 있던 전각들이 매각되고 궁궐의 규모가 축소되었다. 함녕전 행각에도 이때를 기점으로 변형이 가해졌고, 광명문 역시 원래 위치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1938년에 간행된 『덕수궁사(德壽宮史)』에 수록된 광명문의 사진은 좌우 행각이 철거된 모습이다. 1938년에 미술관을 개관할 때 광명문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 홍천사 범종과 보루각 자격루 등 몇몇 유물을 보관, 전시하는 건물로 사용하게 되었다.

위치 및 용도

광명문은 덕수궁에서 왕이 머무는 침전 건물인 함녕전의 외삼문이다. 1919년에 함녕전이 빈전으로 쓰였을 때에는 빈전의 외삼문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938년에 덕수궁이 공원화되면서 미술관 가까운 곳으로 옮겨 유물을 전시하는 야외 전시실로 사용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형태

광명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다. 기둥 상부에는 익공으로 결구하고 겹처마를 갖춘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지붕의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에는 양상도회를 하여 위엄을 갖추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912년에 고종의 친형인 이희공(李熹公)이 죽자 고종은 광명문 밖으로 나와 곡(哭)을 하였다(『순종실록부록』 5년 9월 9일). 1919년에 고종이 승하하자 함녕전에 빈전(殯殿)이 차려졌다. 함녕전 남행각의 치중문까지 빈전에 제물을 올리고 향을 올리는 행각이 조성되었으며, 광명문은 빈전의 외삼문이 되었다. 빈전인 함녕전에서 고종의 재궁이 발인할 때 치중문을 지나 광명문까지 행각을 설치하여 재궁이 나가는 길을 만들었다. 『덕수궁국장화첩(德壽宮國葬畵帖)』에 고종의 재궁을 싣고 광명문을 나서는 소여의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 있다.

참고문헌

  • 『덕수궁국장화첩(德壽宮國葬畵帖)』
  • 문화재청, 『덕수궁 복원정비 기본계획』, 문화재청, 200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