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명전(觀明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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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의 즉조당 서쪽 준명당(浚明堂) 자리에 있었으며, 고종대에 연회를 행한 건물.

개설

관명전(觀明殿)은 즉조당(卽阼堂)의 서쪽에 있으며, 본래 덕경당(德慶堂)이라 불렸다. 덕경당은 고종이 재위 40년이 된 1902년(광무 6) 2월에 황태자로부터 가상존호책보(加上尊號冊寶)를 받은 장소였다(『고종실록』 39년 2월 25일). 그해 5월 4일에 고종의 나이가 51세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를 기념하여 황태자와 함께 덕경당에서 기로소 신하들에게 술을 내리는 선온(宣醞)의 행례가 이루어졌다(『고종실록』 39년 5월 5일).

고종에게 매우 기념적인 행사가 이루어진 곳인 덕경당은 5칸으로 규모가 매우 작았다. 그래서 1902년 10월에 28칸으로 확대하여 짓고 관명전(觀明殿)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관명전을 완공한 후 12월 7일에 내진연을 열어 황태자 이하 내외명부, 종친 및 응참 인원이 차례로 술잔을 받았다. 이날의 행사는 야연(夜宴)까지 이어졌다(『고종실록』 39년 12월 7일). 1903년(광무 7) 2월에도 중화전(中和殿)에서 외진연을 하고, 관명전에서 내진연을 행하였다(『고종실록』 40년 2월 5일).

위치 및 용도

관명전은 즉조당의 서쪽에 위치하며 1902년~1903년에 내진연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변천 및 현황

관명전은 본래 덕경당이었다. 1902년 6월 28일에 덕경당을 헐고 28칸 규모로 확장하여 건립할 것을 결정하였다. 1902년 10월 18일에 공사가 완료되었으며, 관명전이라는 전호를 내렸다.

「경운궁중건배치도(慶運宮重建配置圖)」에는 1904년 대화재 후 즉조당 일대가 재건된 때이므로 관명전이 묘사되지 않았으며, 즉조당 뒤에 3칸 규모의 덕경당이 있다. 1904년(고종 41)에 경운궁 대화재로 인해 즉조당이 소실될 때 관명전도 함께 소실되어 재건할 때에는 즉조당 북쪽에 3칸 규모인 덕경당의 모습으로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현재는 즉조당 뒤편은 공터로 덕경당의 모습도 볼 수 없다.

형태

관명전의 모습은 『[임인십일월]진연의궤([壬寅十一月]進宴儀軌)』에 수록된 「관명전도(觀明殿圖)」에서 확인할 수 있다. 관명전은 장대석을 쌓아 만든 기단 위에 정면 9칸, 측면 4칸의 규모로 건립되었다. 정면의 양 협칸과 측면의 양 협칸은 반 칸 규모로 온돌방 주변으로 퇴를 두른 형태이다. 가운데 3칸은 마루이며, 동온돌과 서온돌을 갖춘 대칭형 건물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추녀마루에는 잡상이 올려졌다.

참고문헌

  • 『[임인십일월]진연의궤([壬寅十一月]進宴儀軌)』「경운궁중건배치도(慶運宮重建配置圖)」「덕수궁지도(德壽宮地圖)」
  • 문화재청, 『덕수궁복원정비기본계획』, 문화재청, 2005.
      1. 그림1_000189034_『(임인십일월)진연의궤』에 수록된 「관명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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