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천구(郭天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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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89년(선조 17)∼1670년(현종 11) = 82세.] 조선 중기 광해군~현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형조 정랑(正郎)⋅성균관 전적(典籍)이다. 자(字)는 사형(士亨)이고, 호(號)는 구봉(九峰)이다. 본관은 현풍(玄風)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중추부 첨지사(簽知事)곽현(郭玹)이고, 동생은 곽천행(郭天行)이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15년(광해군 7)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7세였다.[<사마방목>]

1616년(광해군 8) 증광(增廣)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8세였다.[<문과방목>]

1617년(광해군 9) 가주서(假注書)를 거쳐서, 봉상시 봉사(奉事)가 되었고, 1619년(광해군 11) 거산 찰방(居山察訪)으로 나갔다.

1621년(광해군 13) 춘추관(春秋館)의 사관(史官)을 겸임하였다.

인조 시대 활동

1624년(인조 2) 경기금교찰방(金郊察訪)이 되었고, 경상도영천군수(永川郡守)를 거쳐서, 1625년(인조 3) 경상도 도사(都事)가 되었다.

1626년(인조 4)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가, 형조 정랑(正郎)으로 승진하였다.

1628년(인조 6) 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이 되었고, 1629년(인조 7) 연서도찰방(延曙道察訪)으로 전임되었다.

1630년(인조 8) 진주판관(晉州判官)이 되었으나, 부임한 뒤에 술에 빠져 지내며 고을의 일을 제대로 살피지 않는다고 하여 파직되었다.

1632년(인조 10) 다시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 그 후 벼슬에서 은퇴하여 편안하게 만년을 보냈다.

1670년(현종 11) 노병으로 돌아갔는데, 향년이 82세였다. 사부(詞賦)에 능하였는데, 문집으로 『구봉유고(九峯遺稿)』가 남아 있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