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기수(郭期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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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49년(명종 4)∼1616년(광해군 8) = 68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의 문신, 의병장. 행직(行職)은 예조 좌랑(左郞)이다. 자(字)는 미수(眉叟)이고, 호(號)는 한벽당(寒碧堂), 또는 한벽노인(寒碧老人)이다. 본관은 해미(海美)이고, 거주지는 전라도 강진(康津)이다. 아버지는 정략장군(定略將軍)곽세공(郭世功)이고, 어머니 강진조씨(康津趙氏)는 현감(縣監)조세규(趙世圭)의 딸이다. 처음으로 강진군 해미(海美: 성전면)에 입향(入鄕)한 계공랑(啓功郞)곽간(郭玕)의 손자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79년(선조 12)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31세였다.[<사마방목>]

1583년(선조 16)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5세였다.[<문과방목>] 홍문관 박사(博士)가 되었다가, 호조 좌랑(左郞)과 예조 좌랑(佐郞) 등을 역임하였다. 원외랑(員外郞)으로 있다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외직으로 나가기를 자청하여 전라도부안현감(扶安縣監)으로 나갔는데, 부모가 모두 90여 세의 고령이 되자, 부모의 병을 구완하려고 부안 현감을 사임하고 고향 강진 해미로 돌아왔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경상우도 초유사(招諭使)김성일(金誠一)의 연락을 받고 전라도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왜군의 전라도 침입을 방어하였다. 왜군이 <임진왜란> 때에는 전라도에 침입하지 못하였으나,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전라도까지 침입하자, 곽기수는 임습정(林習靜)과 함께 금릉(金陵: 지금의 강진)에서 의병을 일으켜 예교(曳矯: 지금의 순천)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남과 전공(戰功)을 다투기 싫어하여 다른 사람에게 전공을 양보하고, 고향 해미로 돌아와서 조용히 지냈다.

광해군 시대 활동

광해군 시대에 나라의 정치가 매우 혼란스러운 것을 보고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단념하고, 두문불출하면서 30년 동안 오로지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또 자연의 경관을 즐기고 임천(林泉: 숲과 호수)에 사는 것을 좋아하여 스스로 한벽노인(寒碧老人)이라고 부르며, 자연을 노래한 시문(詩文)을 많이 지었다.

1616년(광해군 8)에 노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68세였다. 문집으로 『한벽당집(寒碧堂集)』이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남과 다투기를 싫어하고 유유자적하였다.

고향 강진 해미(海美: 성전면)로 돌아와서 30년 동안 오로지 『주역(周易)』의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주역』을 깊이 연구한 결과, 『주역』의 역리(易理)로써 귀신을 쫓을 수 있을 만큼 정통하여 『안택지(安宅誌)』를 지었고, 「심학도상(心學圖象)」의 심오한 뜻을 해석하여 『사방해(四方解)』를 지었다.

곽기수가 강진 해미의 대월리(對月里)에 살 때, 월각산(月角山)과 월출산(月出山)과 성전 저수지[城田堤] 등을 한가하게 거닐면서 지은 시(詩)와 부(賦) 등 여러 작품들이 그의 문집 『한벽당집(寒碧堂集)』 상⋅하권에 실려 있는데, 상권에는 오언절구 60수, 칠언절구 62수, 오언율시 18수, 칠언율시 6수, 오언고시 2수, 칠언고시 3수, 악부(樂府) 3편, 가사(歌詞) 1편, 부(賦) 4편, 전(箋) 2편이 있고, 하권에는 기(記) 3편, 지(誌)⋅설(說) 각 1편, 책(策) 2편, 부록으로 유사(遺事)·묘갈명(墓碣銘) 등이 있다. 시(詩)가 50여 수, 150여 편이며, 문(文)이 20여 편이지만, 문학의 모든 분야에 걸쳐 주옥같은 작품이 170여 편이나 된다. 그 중에서 매화⋅대나무⋅달의 순으로 읊은 「한벽당십영(寒碧堂十詠)」, 새소리를 노래한 「팔금영(八禽詠)」, 한글로 연시조 3수를 지은 「만흥삼결(漫興三闋)」 등이 유명한데, 이들은 모두 16세기의 국문학의 시가(詩歌)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곽기수는 벼슬할 때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과 교유(交遊)하였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8년 전에 곽기수가 김성일에게 별봉으로 보낸 편지가 최근 김성일의 안동(安東) 종갓집에서 발견되었다. 당시 당파 싸움에서 밀려나 낙향하여 낙동강의 낚시터에서 낚시를 하고 지내던 김성일을 곽기수는 ‘어대주인(魚臺主人: 낚시터 주인)’이라고 일컬었는데, 곽기수가 보낸 편지의 글은 다음과 같다. “삼가 어대주인(魚臺主人)과 이별한 후에는 이러쿵저러쿵 어지러운 세상에 알고 지내는 사람은 적은데, 제가 늦은 나이에 만난 당신은 바로 저의 스승입니다. 전날에 비가 왔다가 구름이 끼었다가 하므로 벼슬을 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오늘날은 산이 돌고 바다가 변하는 격랑의 시기입니다. 아, 서로 무단히 멀리 이별하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꿈속의 넋이라도 천리 먼 길을 서로 찾아오고 찾아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1584년(선조 17: 만력 갑신년) 초가을. -정해후인(貞海後人) 미수(眉叟)곽기수(郭期壽)가 올립니다.”

이때가 곽기수가 32세의 나이로 홍문관의 청직(淸職)에 있을 때였는데, 서인과 동인의 당파 싸움이 한창 치열한 시기였다. 서인인 곽기수가 동인의 중진인 김성일을 스승처럼 모신 것은 곽기수가 당파에 초연하였기 때문이다. 『학봉전집(鶴峰全集)』에도 곽기수의 시(詩)에 화답하는 김성일의 시(詩)가 실려 있는데, 김성일은 곽기수를 ‘친한 벗’이라고 일컬었다.[『학봉전집(鶴峰全集)』 권1]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 옥사>가 일어났을 때 서인의 중진인 좌의정정철(鄭澈)이 동인의 과격파 정여립과 이발(李潑) 등 1천여 명을 잡아 죽이는 것을 보고, 곽기수는 미련 없이 부안현감의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 초유사(招諭使)에 임명된 김성일은 경상도의 각지에서 백성들을 초유(招諭)하여 의병(義兵)을 일으켜 관군과 연합하여 북상(北上)하는 왜군을 방어하는 한편, 왜군이 전라도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전라도 각지에 격문(檄文)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도록 초유하였다. 이때 전라도 강진 해미에 있던 곽기수도 이에 응하여 의병을 일으켰으나, 왜군이 진주(晉州)에서 진주 목사김시민(金時敏)에게 대패하면서 전라도로 침입하지 못하였다. <임진왜란>은 7년 동안 끌었는데, 김성일은 그 이듬해 전염병에 걸려서 전쟁터의 막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곽기수는 친구 임습정(林習靜)과 함께 금릉(金陵: 지금의 강진)에서 의병을 일으켜 전라도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義兵)과 힘을 합쳐서 예교(曳矯: 지금의 순천)에서 전라도로 침입하는 왜군을 무찌르고 큰 공을 세웠다. 곽기수 등이 이때 왜군과 싸운 사실을 기록한 것이 『금릉창의록(金陵倡義錄)』이다. 당시 강진의 의병장 구성을 보면, 강진군 안에서도 성전면의 해미곽씨(海美郭氏)를 비롯하여, 작천면⋅병영면⋅옴천면에 살던 원주이씨(原州李氏), 해남윤씨(海南尹氏), 청주김씨(淸州金氏) 등의 가문도 포함되어 있다. 『금릉창의록』에는 임진왜란 때 강진뿐만 아니라, 전라도에서 활동한 총39명의 의병장의 이름과 출신과 관직이 쓰여 있으며, 그들의 의병 활동도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책에 기록된 강진 출신의 의병장은 25명이고 다른 지역 출신의 의병장은 14명이므로, 『금릉창의록』이라고 이름을 붙였던 것 같다. 그러나『금릉창의록』에는 강진뿐만 아니라, 전라도 다른 지역의 의병장과 의병 활동을 모두 기록하고 있으므로, 『호남창의록』이라고 부르는 것도 마땅하다고 하겠다.

『금릉창의록』은 주로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전라도 강진 지역에서 결성되었던 의병에 대한 기록이므로, 『금릉창의록』의 각자 기록을 종합하면 <정유재란> 때 전라도 강진의 의병이 순천으로 가서 왜군과 싸운 사실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곽기수가 의병을 조직할 때 김억추(金億秋)⋅임환(林懽) 등은 각지에 격문(檄文)을 보내고, 김응정(金應鼎)⋅조팽년(趙彭年)⋅이준(李浚)⋅정명세(鄭名世) 등은 이에 응하여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미와 병기(兵器)를 준비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앞서 <임진왜란> 때에도 곽기수가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과 싸울 준비를 하였을 때에도 이와 같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곽기수는 남과 전공(戰功)을 다투기 싫어하여 전공을 모두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고향 해미로 돌아왔는데, 왜군과 싸운 무공(武功)에 대하여 집안 자제(子弟)들에게까지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지냈다. 이때 곽기수가 자기의 전공(戰功)을 내세우고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다면, 전라도 광주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질투심이 많은 선조가 자기보다 인기가 많은 신하를 반드시 살려두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순신(李舜臣) 장군도 이를 알고 노량(露梁) 해전에서 스스로 왜군의 총알을 맞고 죽음을 선택하였다는 설도 있다.

1604년(선조 37) 조정에서 임진왜란 때 무공(武功)을 세운 이순신⋅권율(權慄) 등 18명을 뽑아서 선무공신(宣武功臣)을 3등급으로 나누어 포상하자, 강진 지역의 사족(士族)들도 전라도의 의병들이 왜군과 싸운 기록을 후대에 남기려고 각자 의병장으로서 활동한 사실을 작성하고, 또 다른 의병장의 기록도 모아서 『금릉창의록』을 편찬하였다. 이를 주도한 사람은 김응집⋅김억추⋅조팽년⋅이준 등으로 보이는데, 곽기수는 이에 참석하지 않았으나, 뒤에 곽기수의 후손들이 곽기수의 문집인 『한벽당집(寒碧堂集)』을 편찬할 때 『금릉창의록』을 문집 안에 수록하였다. 지금 『금릉창의록』은 곽기수의 『한벽당집』을 비롯하여, 김응집의 『해암문집(懈菴文集)』, 조팽년의 『계음집(溪陰集)』, 황대중(黃大中)의 『양건당집(兩蹇堂集)』 등 모두 4종의 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금릉창의록』에서 곽기수의 전공(戰功)이 다른 사람보다 두드러지게 기록되지 못한 점은 그가 『금릉창의록』을 편찬할 때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릉창의록』은 임진왜란 때 전라도 내륙에서 왜군과 싸운 의병(義兵)을 모두 기록하고 있으므로, 왜란 때 바다에서 왜군과 싸운 수군(水軍)의 활동을 주로 기록하고 있는 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와 서로 보완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금릉창의록』은 비록 간단하지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민간 사료로서 높이 평가된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전라도 강진(康津) 월각산(月角山) 갈대골[蘆洞]에 있는데,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지은 묘갈(墓碣)이 있다.[『송사집(松沙集)』 권27] 무덤은 지금의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城田面) 대월리(對月里)에 있는데, 매년 10월에 해미곽씨(海美郭氏)의 후손들이 그의 무덤 아래에 있는 재각(齋閣)인 노동재(蘆洞齋)에 모여 제사를 지낸다.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 있다.[『기언 별집(記言別集)』 권19]

부인 양산김씨(梁山金氏)는 김선경(金善慶)의 딸인데, 슬하에 3남을 두었다. 장남 생원(生員) 곽치요(郭致堯)는 직장(直長)을 지냈고, 차남 곽치순(郭致舜)은 중추부 동지사(同知事)를 지냈고, 삼남 곽치우(郭致禹)은 문과에 급제하였다. 손자 곽성구(郭聖龜)는 문과에 급제하여, 능주 목사(綾州牧使)와 사헌부 장령(掌令)을 지냈고, 증손자 곽제화(郭齊華)는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掌令)과 사간원 사간(司諫)을 지냈다.[『송사집(松沙集)』 권27]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강진읍지(康津邑誌)』
  • 『계음집(溪陰集)』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금릉창의록(金陵倡義錄)』
  • 『기언(記言)』
  • 『면우집(俛宇集)』
  • 『송사집(松沙集)』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학봉전집(鶴峯全集)』
  • 『한벽당집(寒碧堂文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