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천행궁(果川行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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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과천현 관아 인근에 조선전기부터 말기까지 설치되었던 왕의 행궁.

개설

왕이 궁궐에서 벗어나 외부의 숙소에서 임시로 숙박 혹은 경숙(經宿)하는 곳이 행궁이다. 왕이 도성 내외를 막론하고 숙소로 한번 결정하면 행궁의 명칭을 부여받았다. 왕이 어떤 곳에 행(幸)한다는 의미 자체가 그곳을 행궁으로 만드는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대부분 도성을 벗어나 원거리를 행행하는 능행, 원행, 강무, 온행 시에 임시로 숙소를 만들거나 관사를 이용하면서 행궁이라고 호칭하였다. 다만 왕은 행궁을 사용하지 않을 때에 고위 관원이나 지역 관장도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따라서 행궁은 왕의 임시 처소로서 항구적인 궁의 역할은 하지 않았다. 실제로 왕이 행행한 지역의 행정 명칭을 붙여 지칭하는 것이 많았다. 다만 조선후기에는 외침을 당해 왕이 임시로 피신하면서 이용한 곳이나 미리 왕실의 보장처에 행궁을 마련하면서 이름을 붙인 경우도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 행궁은 시대에 따라 설립 배경에 차이가 있으며, 그 용도와 규모도 구별되었다. 과천행궁은 왕이 도성을 벗어나 헌릉과 인릉으로 가는 능행이나, 화성으로 가는 원행, 온양으로 가는 온행을 거행할 때에 머물던 곳이다.

위치 및 용도

과천은 도성에서 경기도를 거쳐 삼남(三南)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었으므로 과천행궁은 왕이 경기 남부와 충청도에 행차할 때 머물러 쉬거나 숙박하는 장소였다. 과천현은 태종대인 1414년(태종 14)부터 설치되었으므로 이후부터 행궁이라는 명칭이 등장하였다(『태종실록』 14년 윤9월 24일). 현종이 온양으로 온행을 갈 때는 매번 과천행궁에서 지냈다. 행궁으로는 현감이 거처하는 관아를 사용했는데, 인가와 연결되어 시위 병력이 장막을 치고 주둔하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협소하였다(『현종개수실록』 6년 4월 12일).

변천 및 현황

조선전기부터 왕이 사냥이나 강무를 할 때도 과천에 머물렀으나 별도로 행궁을 조성하지는 않았다(『성종실록』 8년 10월 4일). 과천현에 행정 관아와 객사들이 있었기 때문에 행궁을 조성하기보다는 기존 건물을 이용하는 것이 더 간단하였다. 또한 과천이 삼남으로 내려가는 대로변에 위치하였으므로 유사시 행궁을 방어하기 어려웠던 것도 새롭게 행궁을 두지 않은 이유였다. 그럼에도 과천은 왕의 행차가 궁궐을 떠나 하루 내에 이동할 수 있는 최대 원거리 지점에 위치하였으므로 왕의 숙소를 두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예컨대, 현종이 1665년(현종 6) 4월에 온양으로 온행을 하였는데, 서울에서 온양행궁까지는 4일의 여정이었다. 그래서 과천, 수원, 직산에 임시로 행궁을 정해 3박 4일 만에 온양에 도착하였다(『현종개수실록』 6년 4월 7일). 당시 현종의 행차가 서울을 떠나 과천에 도착한 시간은 일몰이라서 행궁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다(『현종실록』 9년 8월 16일).

정조는 화성을 건설하고 현륭원을 조성한 뒤 원행(園幸)을 위해 1년에 2회 이상 과천과 인덕원을 거쳐 화성행궁으로 행차하는 일이 많았다(『정조실록』 17년 1월 12일)(『정조실록』 18년 1월 12일). 이때 과천행궁을 이용하기는 하였으나 동작진을 통해 한강을 건너 남태령 고개를 지나 과천에 이르는 행행로가 불편하였다. 과천 인근의 행행로는 주변 백성들이 동원되어 정비했으므로 민원의 원인이었다. 이에 따라 오늘날 국도 1호선이 지나는 인근인 금천에 시흥행궁을 조성하고 새로운 행행로를 건설하였다(『정조실록』 18년 4월 2일). 정조가 새로운 행행로를 건설하였다고 해서 과천행궁을 폐지하지는 않았으며, 헌릉에 능행할 때는 과천행궁을 휴식처로 활용하였다(『정조실록』 23년 8월 19일). 정조 이후에도 왕이 헌릉에 능행할 때는 과천행궁에서 숙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철종실록』 7년 2월 20일).

형태

과천행궁은 과천현의 관아인 동헌을 사용하였으므로 궁궐식 건축이 아닌 행정관서의 형태였다. 다만 왕들이 자주 이용하던 행궁이라는 점에서 도배 등의 수리는 경기감영의 책임하에 정례적으로 거행하였다.

관련사건 및 일화

1624년(인조 2) 이괄이 도성을 점령했을 때 인조는 말을 타고 양재역을 거쳐 과천으로 피난했다. 그런데 이괄의 반란군에 쫓겨 과천행궁에 유숙하지 못하고 수원을 거쳐 공주까지 내려갔다(『인조실록』 2년 2월 9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만기요람(萬機要覽)』
  • 『배릉등록(拜陵謄錄)』
  • 『북한지(北漢誌)』
  • 『산성일기(山城日記)』
  • 『어영청거동등록(御營廳擧動謄錄)』
  • 『온궁일기(溫宮日記)』
  • 『온행등록(溫幸謄錄)』
  •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 『훈국등록(訓局謄錄)』
  • 김문식, 「18세기 후반 정조 陵幸의 意義」, 『한국학보』88, 일지사, 1997.
  • 김문식, 「조선후기 국왕의 南漢山城 행차」, 『조선시대사학보』60, 2012.
  • 나신균, 「인조~숙종대 행궁의 배치와 공간이용에 관한 연구」, 명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 柳承宙, 「南漢山城의 行宮·客館·寺刹建立考」, 『韓國史硏究』120, 2003.
  • 이왕무, 「영조의 私親 宮·園 조성과 행행」, 『장서각』15, 2006.
  • 이왕무, 「조선시대 국왕의 溫幸 연구」, 『국사관논총』108, 2006.
  •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능행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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