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폐(貢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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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 공물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불러일으킨 각종 폐단 혹은 영조대에 완성된 책 제목.

개설

대동법은 조선후기 중앙과 지방의 재정구조에 질적인 변화를 초래하였다. 대동법을 시행하면서 각 도와 군현에 현물로 분정(分定)되던 공물과 진상이 토지세[大同稅]로 전환되어 중앙의 선혜청 창고에 납입되었다. 선혜청에서는 군현에서 거두어들인 대동미[布·錢 포함]를 도성 내 공인들에게 지급하여 왕실 가족의 일상 물품과 정부관서의 행정 물품을 조달하게 하였다. 그런데 대동법을 6도에 확대 시행하던 18세기 무렵부터 공물을 조달하는 체계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대동법을 시행할 당시 선혜청에서는 공물가를 시중 가격보다 4~5배 높게 책정하여 왕실과 정부관서에 공물이 안정적으로 공급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남는 차익을 통해 공인들이 농사를 짓지 않더라도 생계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런데 이러한 의도와 달리, 17세기에 연이은 자연재해로 곡물의 가격[穀價]이 크게 오르는 한편, 지역 물산도 품종이 줄거나 희귀해져 공인들이 선혜청의 공물가만으로는 물품을 조달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여기에 정부 관료와 하급 서리들이 당초 정해진 수 외에 공물을 추가로 조달케 하거나 불법으로 과외(科外)의 역에 차출함으로써 공인들이 이를 견디지 못하고 점차 공물을 조달하는 역에서 벗어나 도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로 인해 정부에서는 공인에게 미리 지급한 공물가를 회수할 수 없게 되었을 뿐 아니라 경비 물자를 안정적으로 조달하는 데에도 곤란을 겪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공인들에게 추가로 요구하는 각종 물품과 과외로 부과하는 역 등을 조사하고 이를 별단으로 작성하여 단속적으로 처리해 나갔다. 이러한 별단을 「공시인폐막별단(貢市人弊瘼別單)」이라 하는데, 영조대부터 작성하기 시작한 폐막별단은 1753년(영조 29) 무렵에는 대대적인 조사와 처리 과정을 거쳐 『공폐』라는 제목의 책을 만들었다. 이는 순문(詢問)을 통해 도성민들이 겪는 경제적 문제를 왕이 직접적으로 해결해 주고자 한 조치로 이후에도 계속 행하여졌다(『정조실록』 5년 1월 15일).

내용 및 특징

공폐라는 용어가 연대기 사료에 등장하는 것은 영조대부터이다. 효종대에 호서대동법을 시작으로 대동법을 확대 시행하기는 하였지만, 17세기 후반 무렵에는 대흉(大凶)으로 대동세를 제대로 거두기 어려운 해가 많았다. 이로 인해 당시 정부의 공물 정책은 공물주인에게 지급하는 공물가를 일정 비율로 줄이거나 물종의 일부를 잠시 없애는 재감(裁減)의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그런데 18세기 초에 대동법을 6도에 안정적으로 시행한 이후로는 공물정책에 변화가 나타났다. 기존의 공물주인에 포함되지 않던 자들이 신설 전(廛)이나 계(契)를 창설하여 선혜청에서 공물가를 받아 공물주인화해 간 것이다. 대동법이 대외적으로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왕실과 정부관서 역시 제도적으로 정비되어 간데다가, 6도에서 거두는 대동·상정세로 현물 조달을 대신하게 되면서 조달 업무를 맡게 된 공인층이 자연스럽게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정부는 공물 조달에 참여하는 공(貢)·전·계인(契人)이 조달 시장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이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 주고자 애썼다. 우선, 정부에서는 공물가를 받고서 현물을 제때 조달하지 않고 달아난 공물주인의 유재(遺在)를 단속적으로 삭감해 주었다. 또 왕이 도성 내 공인들을 직접 만나 공물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겪는 문제점을 묻고[詢問] 비변사로 하여금 이를 처리하게 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정책 기조는 1753년(영조 29)에 작성된 『공폐』의 서문에 잘 드러나 있다.

서문을 살펴보면, “우리 성상께서 전문(殿門)에 친림하시어 공시(貢市)의 폐단을 직접 묻고 여러 당상에게 이정하고 혁파할 것을 명하셨으니, 성덕이 매우 깊다. 지난 몇 해 사이 국가의 기강이 점차 해이해져 곳곳에 폐단이 발생하였다. 공인에게 주는 값은 후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도 진배에 응하는 것 외에 허다한 부비(浮費)가 날마다 증가하고 달마다 늘어나 지탱하기 어려워 공인들이 흩어져 달아나 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진실로 폐단의 근원을 강구해 보면 궐 내외 각사에서 자의로 침해한 것이 아님이 없다.”고 하였다. 여기서 좀 더 주목할 점은 공폐가 주로 헛된 비용에서 발생한다는 지적이다. 애초에 진배하도록 한 것 외에 헛된 비용이 늘어나 공인들이 도망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여기서 헛된 비용이란 당연히 바쳐야 할 공물 외에 추가로 바쳐야 하는 물품 혹은 무상(無償)으로 하는 역을 가리킨다.

공인들은 정부관서에 물품을 바치는 한편으로 왕실 가족의 행차에 소요되는 물력과 과거 시험장인 과장(科場)에 필요한 제반 물품도 국역(國役)이라는 명목 하에 수시로 바쳐야 했다. 이것은 무상으로 차출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공인으로서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영조대부터는 왕이 궐밖에 친림하여 공시인(貢市人)이 겪는 문제점을 살피는 횟수가 많아졌으며, 1753년에는 공인들이 올린 폐막 내용을 모아 『공폐』라는 책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공폐』에는 봉상시공인(奉常寺貢人), 선공감공인(船工監貢人)과 같이 공물아문에 속해 있는 공인 외에도 모의장(毛衣匠), 지장(紙匠)과 같이 관서에 속한 장인(匠人), 사기계인(沙器契人)과 같은 계인이 포함되어 있다. 이로써 조달 시장에 참여하는 공인층이 18세기 중엽에 확대·분화된 것을 알 수 있다. 『공폐』에는 공인들이 올린 문제점을 차례로 적고, 비변사에서 그 처리 방침을 제사(題辭)로 달아 담당 관서에 분부해 조치하도록 하였다.

변천

조선 정부는 대동법 시행 이후 재정 운영에 시장 조달 방식을 도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시장 가격에 따라 물품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조달상인을 지정하여 공물을 조달하는 역을 책임지우는 방식을 택하였다. 18세기 이후 서울 시장이 활성화된 이후에도 정부는 제민지배(濟民支配) 이념에 기초하여 시장에서 물화가 고르게 분배되고 정부 조달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도록 하기 위해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1753년(영조 29)에 간행된 『공폐』는 이러한 조선후기 정부의 시장정책 속에서 나온 보고서로서 공인들에 대한 대정부의 정책은 이후에도 공시인순막(貢市人詢瘼)의 형태로 19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공폐(貢弊)』
  • 비변사 편, 강만길 해제, 『공폐(貢弊)·시폐(市弊)―한국상업사자요총서(韓國商業史資料叢書) 2』, 여강출판사, 1985. 비변사 편, 조영준 역해, 『시폐―조선후기 서울상인의 소통과 변통』, 아카넷, 2013.
  • 김정자, 「조선후기(朝鮮後期) 정조대(正祖代)의 정국(政局)과 시전정책(市廛政策)―공시인순막(貢市人詢瘼)을 중심으로―」,『한국학논총』 39, 2013.
  • 오미일, 「18, 19세기 공물정책(貢物政策)의 변화와 공인층(貢人層)의 변동」, 『한국사론(韓國史論)』 14,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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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영화, 「대동법 실시 이후 공폐에 대한 고찰」,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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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주희, 「조선후기 선혜청(宣惠廳)의 운영과 중앙재정구조(中央財政構造)의 변화―재정기구의 합설과 지출정비과정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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