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육(龔正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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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말 한인(漢人) 출신으로, 청 태조누르하치에게 잡힌 뒤 높은 대우를 받으면서 한문과 관련한 사무를 처리한 건주여진의 관리.

개설

공정육(龔正陸)은 공정육(龔正六)이라고도 하며, 명 절강(浙江) 소흥부(紹興府) 회계현(會稽縣) 사람이었다. 명말 요동 지역을 여행하던 도중 건주여진(建州女眞)에 의하여 납치된 한인(漢人)으로, 누르하치([奴兒哈赤], nurhaci)에게 우대를 받으며 고문(顧問)으로 역할을 하였다. 1595년 12월 건주여진을 방문한 신충일(申忠一)의 서계에는 왜내(歪乃)라고도 나타나는데 이는 문학외랑(文學外郞)의 ‘외랑’의 전음(轉音)이었다. 1595년 가을 건주여진을 방문하였던 조선의 향통사 하세국(河世國)의 보고에 따르면 당시 공정육이 귀속한 지 30년가량 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가정(嘉靖) 연간에 건주여진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선조실록』 28년 11월 20일). 공정육은 건주여진에서 한문으로 쓰인 문서의 작성을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누르하치로부터 사부(師傅)로 대우받으면서 그의 자식들에게 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1595년~1596년에 이르기까지 조선과 건주여진의 교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활동 사항

공정육에 대한 기록은 명과 청의 사료에서는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이 시기에 여진 부족들은 명과 교역을 하였으나, 한문에 익숙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주로 몽골문자를 사용하였다. 누르하치는 무권점 만주문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공정육에 대해서는 『선조실록』에 비교적 자세히 나타나는데, 이를 통해서 누르하치가 조선이나 명과의 교섭에서 한문으로 작성된 문서를 사용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누르하치는 1595년 3월과 7월에 피로인(被虜人)을 송환하면서 조선에 문서를 보냈다. 이때 조선에서는 명의 금법(禁法)을 이유로 문서를 통한 왕래를 거절하였지만, 답례로 만포진첨절제사의 명의로 차관(差官)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이해 7월 건주여진인들이 경계를 넘어 인삼을 캐다가 조선인들과 충돌하였고 이 과정에서 수십 명의 여진인들이 살해되었다. 누르하치는 보복을 선언하였고, 조선에서는 명의 요동 아문과 자국에 들어와 있던 교련유격호대수(胡大受) 등에게 중재를 요구하는 한편, 신충일을 파견하여 배후에서 교섭하였다.

신충일은 1595년 12월 28일부터 이듬해 1월 5일까지 약 7일간 건주여진에 머물면서 변경 문제와 문서의 왕래 등을 논의하였는데 이때 그와 주로 교섭한 것이 바로 공정육이었다. 당시 신충일은 만포진첨절제사의 명의로 작성된 회답서를 지참하였는데, 공정육은 다시 이에 대한 누르하치의 답장을 작성해 주었다(『선조실록』 29년 1월 30일). 공정육은 1596년 2월 5일 건주여진을 방문한 조선의 역관 이억례(李億禮)와의 교섭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그해 4~5월경 직접 만포로 가서 전후 사정을 고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29년 3월 17일). 당시 공정육은 건주여진의 사정을 조선과 조선에 머물던 명의 관원들에게 비밀리에 보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선조실록』 29년 4월 13일).

1600년 7월 무산과 회령 일대에서 조선군과 건주여진의 군사들이 무력 충돌을 일으켰는데, 이때도 누르하치는 문서를 보내왔다. 조선에서는 이전에 수신한 누르하치의 문서와 필적을 대조하여 그것이 공정육에 의하여 작성된 문서임을 확인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33년 7월 17일). 1600년 이후 공정육에 대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데, 그가 누르하치에게 죄를 입어 주살되었다고도 한다.

저술 및 작품

공정육은 한인이었으므로 한문을 알기는 했지만 문리(文理)가 트인 인물은 아니었다고 한다(『선조실록』 28년 12월 5일). 공정육은 조선과 명에 대한 문서를 전적으로 관장하였는데, 그가 쓴 것으로 분명한 것은 1596년 1월 조선의 차관 신충일에게 건네준 회첩(回帖)이었다. 이 회첩은 『선조실록』의 서계에서는 삭제되었지만, 성해응(成海應)의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에 나타나며 동일한 문서가 승문원(承文院)에서 편찬한 『이문등록(吏文謄錄)』에도 남겨져 있다.

참고문헌

  • 장정수, 「16세기 말~17세기 초 조선과 건주여진의 배후 교섭과 신충일의 역할」, 『한국인물사연구』 25, 2016.
  • 董萬倫, 「努尒哈赤早期漢人顧問龔正陸」, 『黑龍江民族叢刊』, 1995年 4期, 1995.
  • 王鍾翰, 「歪乃小考」, 『淸史論集』 1, 中華書局, 2004.
  • 和田淸, 「淸の太祖の顧問龔正陸」, 『東亞史硏究』(滿洲篇), 東洋文庫, 19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