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미(公作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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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의 공무역 거래값으로 조선 측이 지급하던 목면 즉, 공목(公木)을 대신하여 지급한 쌀.

개설

15세기부터 성행한 일본과의 공무역 대금은 목면으로 지급하였는데, 그 교환 비율[折價]이 대체로 정해져 있었다. 절가 기준에 따라 지급하는 목면을 공목 또는 공작목(公作木)이라 하였다. 이 목면은 조선 정부가 농민들로부터 거둔 세금이기 때문에 공목이라 부르는 것이다.

공목은 처음에는 품질이 좋은 8승 40척의 목면으로, 양끝에는 청사(靑絲)를 사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점차 품질이 떨어져서 5승 35척의 목면으로 지급되자, 일본 측 즉, 대마번(對馬藩)에서는 받기를 거부하여, 양국 사이에 대금 결제를 둘러싸고 마찰이 자주 일어났다.

더하여 17세기 이후 일본 국내에서 목면 생산이 늘어나자, 대마번의 입장에서는 공목으로 대금을 받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또한 대마도는 경지 면적이 부족하여 쌀의 자급자족이 원활하지 못하였다. 때문에 대마번에서는 공목의 일부를 쌀로 바꾸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공무역 대금으로 공목 대신 지급한 이 쌀을 공작미(公作米)라 부른다. 공작미는 공목을 쌀로 만드는, 즉 작미(作米)한다는 공목작미(公木作米)를 줄인 말로서, 그 행위나 그 쌀을 뜻한다.

연원 및 변천

공목 일부를 쌀로 바꾸어 준 것은 1651년(효종 2)부터이다. 공목 300동 즉 15,000필을 1필에 쌀 12두로 환산하여 12,000석 곧 180,000두를 지급하였다. 1660년(현종 1)에는 공목 100동 즉 5,000필이 증가되어 400동 곧 20,000필로 늘어나면서, 공작미가 16,000석 곧 240,000두로 증가하였다.

원래 공목은 경상도 내 군현의 전세(田稅) 중에서 징수하고, 쌀 5두에 목면 1필의 비율로 작목(作木)하여 동래 왜관에 지급하였다. 그런데 공작미가 처음 지급된 1651년 당시 풍년이 들어 서울에서는 품질이 좋은 목면 1필 값이 쌀 12두 정도였다. 그래서 1651년 당시에 1필당 12두 비율로 지급하였는데, 이것이 관례가 되어 버렸다. 그 결과 공목 1필당 7두씩의 추가 부담이 농민에게 전가되어, 농민들의 원성이 높았다.

1678년(숙종 4)에 제정된 『영남대동사목』에서는 1필 12두에서 2두를 감하고, 그 부족분을 도내 전세조에서 지출하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 규정이 어느 정도 잘 실시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다가 1811년(순조 11) 통신사 파견 때 공목 1필당 10두로 조정되어, 1812년(순조 12)부터는 13,333석 5두의 쌀을 지급하게 되었다.

형태

공작미는 처음에는 경상도 동부 지역의 17읍에서 징수되었다. 이 지역을 하납읍(下納邑), 이 공작미를 하납미(下納米)라 하였다. 경상도에서 서울로 상납하지 않고 동래부로 내려보내 납부한다는 뜻에서 하납미라 하였다. 처음 정해진 하납읍은 연강연읍(沿江沿邑) 지역이었으나, 그 후 추가되어 40여 읍 정도로 증가하였다. 경상도 71개 군현 중 절반 이상이 공작미 납부의 부담을 지고 있었다.

하납읍에서 징수된 공작미가 왜관에 반입되는 것은 3·4월부터 시작하여 8·9월경에 완납되는 것이 관례였다. 이 공작미는 부산진(釜山鎭)에 있는 부창(釜倉)으로 운송되어, 공작미고(公作米庫)에 보관되었다. 공작미 운송은 운미소(運米所)에서 담당하였다. 운미 담당의 책임은 운미감관이 맡았다. 공작미를 담당하는 아전인 공작미색리는 동래부의 서계색리(書契色吏)가 겸직하고 있었다.

공작미 지급은 약조로 체결된 정식 규정한 것이 아니라, 5년 기한의 한시적인 조치였다. 공작미 지급 기한이 만료될 때마다, 대마번은 공작미의 안정적인 확보를 위하여 교섭 업무를 전담하는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 사신을 ‘공작미연한재판(公作米年限裁判)’이라 불렀다. 공작미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대마번은 ‘대마도는 조선의 번방(藩邦)’임을 강조하면서, 기한의 연장을 요청하였다. 조선은 특별한 은혜를 베푼다는 입장에서 기한을 연장해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인 시혜는 외이(外夷)를 복속시켜 대외적인 평화를 도모한다는 기미(羈縻)정책의 일환이었다. 즉 공작미의 지급은 조선이 대마도를 견제하는 방법이기도 하였다.

공작미 지급에 대해 일본 즉, 대마도 측은 일방적인 시혜라고 보는 조선과는 시각을 달리했다. 일본 측은 공작미 지급을 양국 간의 약조로 보고, 공작미 지급이 대마도의 일방적인 간청이 아니라 쌍방의 편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 측은 조선과의 무역을 통해 쌀을 조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남쪽 변방의 안전’이라는 조선의 국방 문제와 연결시켜서 이해하였다. 그리고 대마도에 대한 ‘세사미(歲賜米)’라는 정치적인 의미보다는, 순수하게 경제적인 의미가 부여된 ‘무역미’로서 공작미를 파악하였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공작미는 규정된 액수와 품질이 제대로 준수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지급이 지체되어 미수가 증가하였다. 미수가 늘어난 것은 첫째, 조선의 쌀 생산이 부진하여 공작미 조달이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둘째, 조선 측의 공작미 지급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의 농간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작미에 쌀겨나 모래를 섞기도 하고 물을 적셔 무게와 부피를 늘이는 수작을 부리기도 하였다. 공작미의 포흠(逋欠)은 경상감사, 하납읍의 수령과 이서층, 동래부의 수령, 군관, 이서층, 운미감관, 서울에서 파견된 일본어 역관 등 다양한 주도층의 상호 유착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중에서도 특히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운미감관이었다.

공작미 포흠의 양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수표미(手標米)이다. 수표로써 공작미를 구입하여 판매하는 과정에서 여러 폐단이 발생했으므로, 수표미라고 불렀다. 수표미는 공무역 대금 결제로 지급되는 공작미를 만기일 전에 지급할 경우, 미리 공작미를 포흠하여 이를 정액보다 싼 값으로 지급하면서 정액의 수표를 받아두었다가, 공작미를 결제할 때 차액을 남기는 것이다.

이러한 수표미 매매를 비롯한 공작미 포흠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개선책으로 1782년(정조 6)에는 「수표미방금절목(手標米防禁節目)」, 1788년(정조 12)에는 「하납개규정신반절목(下納改糾正新頒節目)」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절목 제정 등 개선책에도 불구하고, 공작미 포흠은 조선후기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에 편승하여 19세기 농민 항쟁의 중요한 배경의 하나가 될 정도로 더욱 확대되어 갔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변례집요(邊例輯要)』
  • 『영남대동사목(嶺南大同事目)』
  • 『공작미등록(公作米謄錄)』
  • 『공작미년한기록(公作米年限記錄)』
  • 『통문관지(通文館志)』
  • 『동래부지(東萊府志)』
  • 『춘관지(春官志)』
  • 『부역실총(賦役實總)』
  •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 『만기요람(萬機要覽)』
  • 『영남청사례(嶺南廳事例)』
  • 『동래부계록(東萊府啓錄)』
  • 정성일, 『조선후기 대일무역』, 신서원, 2000.
  • 田代和生, 『近世日朝通交貿易史の硏究』, 創文社, 1981.
  • 김경란, 「조선후기 동래부의 공작미 운영실태와 그 성격」, 『역사와 현실』 72호, 2009.
  • 김동철, 「17·18세기 대일공무역에서의 공작미 문제」, 『항도부산』 10호, 1993.
  • 정성일, 「조선후기 쌀과 인삼 무역을 둘러싼 상호인식」, 『한일양국의 상호인식』(한일관계사학회편), 국학자료원, 1998.
  • 田代和生, 「對馬藩の朝鮮米輸入と倭館枡」, 『조선학보』 124집,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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