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관(公使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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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간 조약을 체결한 후 조약 관계국의 공사가 상주하면서 대표 업무를 담당하는 공적인 공간.

개설

공사관은 국가 간 조약을 체결한 후 외교와 자국민 보호 등을 위하여 조약 상대국에 설치한 상주 외교공관으로 대사관·공사관·영사관·대표부 등으로 구분되었다. 일반적으로 공사관은 치외법권을 보유해 상대국의 사법 및 경찰권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일본은 1876년(고종 13) 조선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뒤 1880년에 최초로 서울에 공사관을 설치하였다. 미국은 1882년(고종 19) 조선과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을 체결한 다음 해에 서울 정동에 미국공사관을 설치하였고, 그 후 영국·러시아·독일·프랑스 등도 공사관을 두었다. 한편 조선은 1887년(고종 24) 최초로 일본에 공사를 파견해 동경에 공사관을, 그다음 해인 1888년(고종 25)에는 서구 열강 중 최초로 미국의 워싱턴에 공사관을 각각 설치하였다. 그러나 1905년(광무 9) 을사늑약으로 한국 주재 각국 공사관과 해외 주재 한국공사관은 모두 폐쇄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은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에 이어 영국·러시아·프랑스 등 서구 열강과 근대적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전근대적인 조공 관계에서 벗어나 근대적인 조약 체제로 재편되어 갔다. 그 결과 전통적으로 중국과 일본으로 대표되는 외국과의 현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던 것과는 달리, 근대적 외교관계 수립 이후 각국의 상주 외교사절이 파견되어 공관이 설치됨으로써 국가 간 첨예한 이해의 각축이 공사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개항 후 조선에 주재하였던 외국 공사관은 치외법권을 보유해 상대국의 사법 및 경찰권의 적용을 받지 않으면서 정치적·외교적·경제적으로 자국의 이익을 대변하고 영향력을 확장하는 거점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이 직접 근대적 문물을 접할 수 있는 창구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공사관의 주둔 병력이 조선의 정치에 간섭하는 무력으로 기능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각국의 공사관은 단순한 외교사절의 역할을 넘어 조선 사회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구였던 것이다.

조직 및 역할

조선에 주재한 공사관은 각국의 사정에 따라 조금씩 달랐지만, 대체로 공사를 비롯하여 서기관, 육군·해군무관, 통역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편 조선도 1887년과 1888년에 각각 주일공사관과 주미공사관을 개설하였는데, 공사·참찬관·서기관·번역관 등으로 구성되었다.

공사관의 규정으로는 갑오개혁 기간 중인 1895년 3월 25일 「외교관 및 영사관 관제(外交官及領事官官制)」)와 「공사관·영사관 직원령(公使館領事館職員令)」이 처음으로 반포되었다. 이 관제에 의하면, 외국에 주재하는 공사를 특명전권공사·판리공사·대리공사로 구분하고, 공사관에 2명 이하의 1등·2등·3등 참서관과 3인 이하의 서기생을 두었다. 특명전권공사와 판리공사는 칙임관이고, 대리공사와 공사관의 1·2·3등 참서관은 주임관이며, 서기생은 판임관으로 규정되었다. 이 관제는 1898년 4월 30일에 「외교관 및 영사관 관제(外交官及領事官官制)」로 개정되었는데, 전체적으로 커다란 변화는 없었다.

공사관은 근대적 외교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설립된 상주 공사관으로서 자국의 대외정책을 수행하는 중심지였다. 특히 조선의 경우 해외 공사관의 설치는 자주독립을 대내외에 과시하였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컸다. 또한 조선공사관은 상재국에 장기간 주재하면서 양국 간의 외교 현안을 처리하였을 뿐 아니라 국제정세의 동향을 광범위하고 체계적으로 파악하였다. 공사 관원 출신 중에는 귀국 후 정부의 각종 개화·자강 추진기구에서 근무하거나 갑오개혁·독립협회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정치·외교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활동한 인물들이 많았다.

변천

일본은 조일수호조규 체결 후 4년 뒤인 1880년에 조선에 공사관을 설치하였는데, 임오군란(1882년)과 갑신정변(1884년)으로 공사관이 불타 버려 남산 기슭으로 옮기는 수난을 겪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의 11개국은 조약 체결 후 비준이 교환되자 경운궁(현 덕수궁) 주변의 정동에 주로 공사관을 설치하였다. 이로 인하여 정동은 공사관 거리로 불리기도 하였다. 다만 이탈리아는 1884년에 조약을 체결한 지 17년이 지난 1901년에 영사관을 개설하였고, 오스트리아와 덴마크 두 나라는 끝내 공사관을 개설하지 않았다. 그러나 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함으로써 한국 주재 각국 공사관과 해외 주재 한국공사관은 모두 폐쇄되었다.

참고문헌

  • 손정목, 『한국개항기 도시변화과정연구』, 일지사, 1984.
  • 이순우, 『정동과 각국 공사관』, 하늘재, 2012.
  • 장규식, 『서울, 공간으로 본 역사』, 혜안, 2004.
  • 하원호 외, 『개항기의 재한 외국공관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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