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公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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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官用)의 물품을 수입하기 위해, 정해진 값이나 교환 비율에 따라 진행하는 무역 형태.

개설

조선초기 일본과 무역을 시작한 것은 경제적 목적보다는 왜구를 막기 위한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다. 일본의 경제적 욕구를 수용하여 조선의 포구를 열고 무역 공간을 마련하였다. 일본 사절은 조선 왕에서 바치는 진상품을 바치고, 이에 대해 조선에서 회례품(回禮品)을 지급받았다. 서울에 도착한 후 일본에서 가져온 물품을 관청에서 사들였는데 이를 공무역이라고 한다. 주된 공무역 수입품은 동(銅)·납(鑞)·소목(蘇木) 또는 단목(丹木)·호초(胡椒) 등이었다. 공무역 물품은 교환 비율이 있어 이윤이 적었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점차 거래 물량을 늘여나갔다. 조선에서는 공무역으로 더 이상 일본 물품을 수용할 수 없게 되자 조선 상인에게 이를 수입하도록 하는 사무역을 허락하게 되었다.

조선후기에는 공무역 4대 정품(定品)이라고 불리는 동·납·물소 뿔[水牛角]·소목이 중요 수입 물품이었다. 세조 이후 공무역 결제는 목면[公木]을 위주로 하였다. 그런데 1651년(효종 2) 이후 목면의 일부가 쌀로 바뀌는 공작미제(公作米制)가 실시되었다. 공작미는 경상도민이 부담하였는데, 목면과 쌀의 비율이 1필 12두로써, 당시 농민들의 전세(田稅)보다 2.5배나 많은 쌀을 내야 했다. 농민의 부담이 누적되고, 관리의 포흠, 공작미 질의 하락 등의 폐단이 나타나자, 19세기 전반부터 공작미 일부는 돈으로 대납(代納)되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대일 공무역이 본격화된 것은 세종조 이후였다. 공무역은 물품의 교환 비율이 정해져 있었다. 구리는 상품(上品)의 경우 2근 반에 면포 1필, 하품은 4~5근에 1필 정도였다.

일본 수입품에 대해 면주, 마포, 면포를 지급하였는데 면포의 생산이 증가하고 품질이 좋아짐에 따라 일본은 면포 지급을 선호하였다. 면포 수출량은 15세기 후반부터 늘어나는 추세였다. 면포는 중요한 수출품이면서 국내에서는 화폐로 기능하였으므로 국내 상업 발달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면포는 일본에서 1467년에 일어난 ‘응인(應仁)의 난’이 한창일 때 군복용으로 대량 수출되었다. 또한 1473년(성종 4)에는 청수사(淸水寺) 재건 비용으로 동전, 면주, 면포 등을 요구하고, 조선에서는 마포 천필, 면포 천필, 조미(糙米) 500석을 지급하였다. 이 이후 일본의 대명(大名)이나 영주들이 동을 수출하고 그 대가로 면포를 얻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대마도나 북구주·산음(山陰) 지방에서는 작은 배로도 조선과 왕래하면서 면포를 수입해 갔다. 처음 군수용으로 수출된 면포가 일본 서민의 의복용으로 크게 보급된 데 기인하여 면포 수출량이 조선의 내수용분을 위협할 정도로 증가하였다. 이에 조선에서 점차 목면의 대일 수출량을 통제해나가자, 일본은 중국산 면포의 수입을 계획할 정도였다. 15세기 후기 이후 1세기 동안 조선에서 수출된 목면의 양은 비약적으로 증가하였고, 이식 목면도 동시에 정착하였다. 일본 동해도(東海道)산 목면이 상품으로 일본 국내 시장에 출회되기 시작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국교가 재개되어 공무역이 재개되었지만 면포는 더 이상 일본에서 선호하는 물품이 아니었다. 면포 대신 경상도에서 생산되는 쌀이 공작미란 이름으로 매년 수출되었다.

조선전기에 조선 무역은 일본 막부(幕府), 대명, 각 지역의 호족, 대마도주 등 각 계층별로 이루어졌으나 조선후기에는 일본 내에서 대마도주로 단일화되었다. 대마도는 토지가 부족하여 식량난에 대한 우려가 있었으므로 목면 대신 쌀을 선호하였다. 1651년 조세로 거두어들인 공목을 일부 쌀로 바꾸어[作米] 지급하였다. 처음에는 5년 동안 시행하는 일시적인 지급 형태였으나 5년마다 공작미를 요청하는 사절을 보내고, 끈질긴 외교 교섭을 통해 공작미 지급은 계속되었다.

변천

대일 공무역은 세종대에 와서 이전에 비해 무역량이 증가하는 한편 무역품의 종류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태종대까지는 주로 일본의 소목, 호초가 수입되었으나 세종대에 와서 일본에서 유황, 동, 주석 등 광산물이 중요 물품으로 등장하였다.

공무역에는 가격이 정해져 있어, 많은 이익을 낼 수 없었다. 반면 사무역은 가격에 대한 제한이 없어 자연히 이윤이 커졌기 때문에 양국의 상인들은 사무역을 선호하였다. 그런데 사무역에 편승하여 밀무역까지 성행하고, 상인끼리의 분쟁도 생기자 세종 말기에는 무역품의 일부분만 서울에 올려 보내어 공무역을 시행하고, 나머지는 포소에서 조선 관리의 감시하에 사무역을 하도록 하고 또 포소 체류 기한을 규정하였다. 세조 말기에는 사무역을 금지시키고 공무역만을 하도록 제한하기도 하였다. 1485년(성종 16)에 일시 사무역을 허락하였지만 1494년(성종 25)에는 다시 공무역만 하도록 제한하기도 하였다.

조선후기 공무역에서 가장 큰 변화는 쌀이 목면을 대체하여 일본에 수출된 것이다. 17세기 전반 이후 일본에서 목면 생산이 이루어짐에 따라 토지가 척박한 대마도에서는 목면보다는 쌀로 결제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공목 일부를 쌀로 바꾸어 준 것은 1651년부터이다. 공목 300동 즉 15,000필을 1필에 쌀 12두로 환산하여 12,000석 곧 180,000두를 지급하였다. 1660년(현종 1)에는 공목 100동 즉 5,000필이 증가되어 400동으로 늘어나면서, 공작미가 16,000석 곧 240,000두로 증가하였다. 1678년(숙종 4)에 쌀의 교환 비율을 1필 10두로 감하였으나 1811년(순조 11)에 다시 1필 10두로 재규정하였다.

의의

조선초기 대일 무역을 시작한 것은 왜구를 평화적 통교자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일본에서 필요한 물자를 조선에서 구입하고, 일본에서 가져온 물품을 조선에서 사들여서 그들의 경제 활동을 도왔다. 국가 주도로 일본과의 무역에 나섬으로써 조선초기 대일 무역에서는 공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다. 공무역의 활성화로 사무역의 발전을 가져오고, 일본 상인을 대응할 국내 상인이 성장함으로써 국내 상업의 발달을 가져왔다.

공무역으로 수입하는 물품은 동남아시아산이 많았으므로, 조선 대외무역의 외연이 확대되었다. 정액, 정품 거래의 무역 형태이며, 외교적 성격을 띤 공무역은 전근대 무역 구조의 양상을 살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물품 가운데에는 긴요한 군수 물품이 많아 조선의 군비 증강에 기여하였고, 염료 수입으로 의복에 사치 경향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특히 조선후기에 수입된 왜동(倭銅)은 상평통보의 원료가 됨으로써 조선의 화폐 유통에도 기여하였다.

조선후기 대일 무역은 부산 왜관에서 이루어졌고, 공무역은 왜관에 체류하던 일본어 역관[倭學譯官]이 담당하였다. 역관은 공무역을 주관하면서 부연역관(赴燕譯官)의 물품을 일본에 수출하고, 자신이 무역 상인이 되어 개시 무역에 참여하거나, 때로는 밀무역을 주도함으로써 부상(富商)으로 성장하였다. 역관의 공무역 주도는 조선후기 무역 상인의 다양화, 부상의 출현을 가져온 배경이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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