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림사(公林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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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대 88개 자복사 가운데 하나로,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 모산리에 있었던 절.

개설

공림사(公林寺)는 태종대에 전국의 자복사를 88개로 정비할 당시 자은종의 자복사찰로 지정되었다. 문헌상으로만 전해오다가 1999년 전남대학교 박물관의 발굴 조사에 의해 절터가 밝혀졌다. 발굴 조사 현장에서 ‘공림사(公林寺)’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됨으로서 그동안 기록으로만 존재하던 공림사의 정확한 위치가 확인되었다. 절의 연혁은 전하지 않으나, 통일신라말에 창건되어 고려초에 중창된 절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 태종 때 자은종(慈恩宗)의 자복사찰(資福寺刹)로 지정되는 등 지방의 명찰(名刹)이었지만, 세종 때 능성현(綾城縣)의 화재 사건으로 폐사되었다.

내용 및 변천

(1)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들어와 1407년(태종 7) 12월, 능성(綾城, 현 전라남도 화순) 공림사가 자은종의 자복사찰로 지정되었다(『태종실록』 7년 12월 2일). 당시 조선시대의 불교 종파는 이전 11개(혹은 12개)에서 조계종(曹溪宗), 천태종(天台宗), 화엄종(華嚴宗), 자은종(慈恩宗), 중신종(中神宗), 총남종(摠南宗), 시흥종(始興宗) 등 7개 종파로 정리되었는데, 능성 공림사는 자은종에 소속된 자복사찰이었다. 자복사찰은 나라와 그 고을의 복을 빌기 위해 지정한 사찰이었으므로, 조선초기 공림사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1530년(중종 25)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공림사에 대한 기록이 나타지 않는 것으로 볼 때 1530년 이전에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공림사의 폐사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449년(세종 31) 8월 전라도 능성현(綾城縣)에서 발생한 화재 사건으로 절이 소실되지 않았을까 추정하고 있다. 그것은 세종 때 전라도 능성현의 향교 생도 양회(梁淮) 등이 평소 고을에 재암(齋庵)이 많은 것에 불만을 품고 현령(縣令)최추(崔湫)에게 불살라 없앨 것을 요청하여 허락을 받고 재암 11곳을 불살라버린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최추, 양회 등은 유배형에 처해졌다(『세종실록』 31년 8월 15일). 공림사는 조선초 억불 정책이 추진되던 시기에 지방관과 유림 세력이 합세한 폭압적 횡포에 의해 폐사되는 운명을 맞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2) 현대

1999년 전라남도 능주-화순 구간 도로 확장 포장 공사 중에 발견된 절터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공림사의 정확한 위치가 밝혀졌다. 전남대학교 박물관이 진행한 발굴 조사에서 기와 명문에 ‘공림사(公林寺)’와 ‘능성군(陵城郡)’이 새겨진 기와 명문이 발견되었다. 조사 보고에 따르면 공림사의 범위는 길이 약 180m, 너비 약 120m로 추정되고, 맨 아래층에는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는 1채의 건물지, 중간층에는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3채의 건물지, 위층에는 5채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중간층에서 나온 ‘공림사’의 명문이 새겨진 기와는 고려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아래층에서 건물지와 기와들이 출토되었기 때문에 통일신라 말에 창건되어 고려초에 중창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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