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회(高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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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환관으로, 요동에 광산 개발과 세금 징수를 위하여 파견된 인물.

개설

고회는 1599년 4월에 요동에 파견되어 광산을 개발하고 세금을 거두는 것을 감독하였다. 고회는 요동뿐만 아니라, 조선에도 물품을 요구하였다. 1601년 가을부터 고회가 차관장겸과 이자태 등을 보내서 조선에 요구한 토산물이 수천여 건에 이른다고 할 정도였다.

활동 사항

고회는 본래 시정의 무뢰배로 처자가 있는 자였다. 어렸을 때는 숭문문의 세과를 청부하는 일을 맡았다. 1599년 4월에 요동에 파견되어 광산을 개발하고 세금을 거두는 것을 감독하였다. 그가 요동광세태감(遼東鑛稅太監)에 임명된 이유는 당시 명이 많은 전쟁 수행과 건축 등으로 인하여 재정이 부족해진 배경에 있었다. 만력제(萬曆帝)는 세수의 부족을 충당하기 위하여 광산의 개발과 상세의 증세를 계획하여 전국 각지에 환관을 감세사(監稅使)로 파견하였다. 그중의 한 사람이 고회였다.

그는 광산 개발을 통하여 광세(鑛稅)를 거둔다는 명목으로 민간에서 마구잡이로 약탈을 자행하였는데, 1608년 경사로 돌아올 때까지 10년간 요동에서 횡포를 부렸다. 광세를 거두기 위하여 고회는 일시적으로 임무를 맡긴 관리인 위관(委官)과 개인적으로 편성한 가인(家人)이나 사병인 가정(家丁)을 활용하였다. 여기에 지방에서 불법을 저지른 자들인 악곤(惡棍)이라는 존재들도 휘하에 두었다. 이들은 백성들을 체포하여 죽이는 등 횡포를 부렸다. 이 때문에 요동 지역에서는 1600년 김득시(金得時) 등이 원한을 품고 50,000명의 주민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603년 봄에는 고회가 요양·진강·금주·복주·해주·개주 일대에서 수십만 냥의 은자를 강탈하자, 백성들은 집을 버리고 도망가 버리기도 하였다. 고회가 요동을 떠나면 안정되고 고회가 있으면 요동이 멸망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고회는 요동뿐만 아니라, 조선에도 자신의 사적 이득을 채우기 위하여 물품을 요구하였다. 그는 1600년(선조 33) 요양(遼陽)을 관장하고 있으면서 2번이나 조선에 문서를 보내 토산물을 요구하였다. 조선에서는 이를 매우 곤란해하였다(『선조실록』 33년 2월 9일). 고회가 조선에 저지른 횡포와 관련해 1602년의 실록 사신평을 보면, 1601년 가을부터 고회가 차관이자태(李自泰)와 장겸(張謙) 등을 보내서 요구한 토산물이 수천여 건에 이른다고 하였다(『선조실록』 35년 윤2월 1일).

또 그는 1601년(선조 34) 10월에는 중강개시를 폐지하려는 조선의 처사를 힐난하는 패문(牌文)을 의주부윤서성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조선 사정이 급박해졌을 때는 개시해 달라고 사정하더니 상황이 조금 안정되었다고 청할 수 있느냐고 비난한 것이었다. 조선은 결국 중강개시를 계속 존속시킬 수밖에 없었다. 고회는 1603년(선조 36) 2월에도 조선에 자문을 보내 이번에는 중강에서 은을 사용하여 거래하자고 하였다(『선조실록』 36년 1월 28일). 명은 관료나 군사들의 급여를 은으로 지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은의 획득은 부를 창조하는 지름길이었던 것이다.

그에 대한 조선의 평가를 보면, 고회가 국정의 요직에 앉은 뒤부터 황제의 명이라 칭탁하면서 오는 차관의 행차가 도로에 연이었는데, 그들의 요구는 날로 급해 가고 요구에 미처 응하지 못하면 꾸짖는 말이 계속 이르렀으므로 민간에 쓰는 것과 국가의 힘이 이 때문에 더욱 고갈되었다고 하였다(『선조실록』 36년 1월 28일).

고회의 횡포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고회가 임진왜란 때 도와준 적이 있는 데다 황제의 측근인 그가 조선에 대하여 불리하게 상주할 것을 우려하여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고문헌

  •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1988.
  • 서인범, 「명대의 요동광세태감 고회와 조선의 고뇌」, 『중국사연구』 56,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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