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원필경(桂苑筆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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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의 학자이며, 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857∼?)의 시문집.

개설

최치원은 한국의 9세기, 10세기에 활동하였던 대표 문인으로, 자는 고운(孤雲)이다. 12세에 당나라로 유학을 갔으며, 6년 만에 빈공진사(賓貢進士)에 급제하였다. 이후 율수현위(溧水縣尉)로 보임되어 활동하였으며, 879년 고변의 종사관이 되어, 884년 막부를 떠날 때까지 만여 편의 글을 지었다. 그 글들 가운데 『격황소서(檄黃巢書)』는 하루아침에 그의 문명을 세상에 떨치는 계기가 되었다. 귀국한 이후 그는 당나라에 있을 적에 저작한 『계원필경(桂苑筆耕)』, 『중산부궤집(中山覆簣集)』과 『시부집(詩賦集)』 등 28권을 찬성(撰成)하여 헌강왕에게 바쳤는데, 그 중 『중산부궤집』과 『시부집』 등 8권은 전하지 않고, 『계원필경』 20권만 전한다. 최치원의 재당시의 대표적인 저술 『계원필경』 중 권1~16은 양주에서 고변의 종사관으로 있을 때 지은 군문(軍文)이며, 권17~20은 최치원 자신의 입장에서 쓴 글이다.

서지 사항

20권 4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활자본이다. 지질은 한지이며, 규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계원필경』 20권의 체재와 내용을 보면, 서문을 서두로 하여, 권1ㆍ2에 표(表) 20수, 권3에 장(狀) 10수, 권4ㆍ5에 주장(奏狀) 20수, 권6에 당장(堂狀) 10수, 권7~10에 별지(別紙) 80수, 권11에 격서(檄書) 4수와 서(書) 6수, 권12·13에 위곡(委曲) 20수, 권13에 거첩(擧牒) 50수, 권15에 재사(齋詞) 15수, 권16에 제문ㆍ서(書)ㆍ기 10수, 권17에 계(啓)ㆍ장 10수, 권18에 서(書)ㆍ소(疏)ㆍ장ㆍ계 25수, 권19에 장ㆍ계ㆍ별지ㆍ잡저 등 20수, 권20에 계ㆍ장ㆍ별지ㆍ제문ㆍ시 등 40수로 구성되었다. 권1~5까지는 고변(高駢)이 황제에게 올리는 표와 장을 최치원이 대필한 것이며, 권6에서 권10까지는 고관대작들에게 주었던 공문별지(公文別紙)이며, 권11은 유명한 ‘격황소서(檄黃巢書)’를 비롯한 격문과 서(書)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대체로 받는 이들을 설득시키는 힘이 강한 변려문으로 많은 고사를 인용한 화려한 문체이다. 풍부한 고사와 적절한 대구(對句)와 압운(押韻)은 후세인의 경탄을 자아내기에 족하다. 특히 권15의 ‘재사’ 15수는 당대(唐代)의 도교(道敎)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알려져 있고, 권16의 ‘보안남록이도기(補安南錄異圖記)’는 월남(越南)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필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권17에서 사도상공(司徒相公)인 고변(高駢)에게 중국 역대의 영웅들을 나열하고, 그에게 대비시키며 칭송한 『기덕시(記德詩)』 30수는 주제가 너무 노골화되어, 시로서의 품격을 잃은 것도 있다. 예를 들어 최치원은 당시 상사였던 고변(高駢)을 장량(張良)에 비유하여 천하를 평정한 국태민안의 주역으로 보고, 시를 통하여 그를 구가하면서, 고변을 과대평가하고 있다. 또 ‘안남(安南)’이라는 시에서는 남만(南蠻) 출신인 안남을 마음껏 멸시하고 있다. 권20은 귀국 직전의 작품으로 인정되고 있는데, 여기에 실린 글들은 대부분 자신의 정감을 읊고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장이다. 특히, ‘사허귀근계(謝許歸覲啓)’에서는 자신의 짙은 정회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문집에는 시가 60수 정도가 되는데, 그 중 권17의 시 30수는 송덕시(頌德詩)인 만큼 문학적 가치에는 한계가 있으나, 권20의 시 30수는 이와는 달리 진솔한 그의 심경이 잘 나타나 있으며, 혁명을 노래한 것으로 여겨지는 ‘야소(野燒)’에서는 난세에 옥과 돌이 구분도 없이 타버리는 현실을 박진감 있게 노래하고 있다. 한편 ‘산정위석(山頂危石)’에는 자존(自尊)의 긍지와 이기적인 세태에 대한 울분이 담겨 있다.

의의와 평가

이 책은 현전하는 한국 최초의 문집이자, 한국한문학사에 있어 ‘개산초조(開山初祖)’의 위치를 차지한다. 수록된 작품들은 모두 저자의 명문만을 가려 넣었으며, 특히 권11에 수록된 「격황소서」는 황소(黃巢)가 이것을 읽고, 상 앞에 엎어지는 것도 모를 정도로 놀랐다는 일화가 있다. 또 「헌생일물장(獻生日物狀)」은 인삼(人蔘)연구에, 「보안남록이도기(補安南錄異圖記)」는 월남사(越南史)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며, 또한 당대전란사(唐代戰亂史), 한족(漢族)과 남만(南蠻)의 교섭관계, 신라와 당과의 교통 및 문화교류 등의 연구에 문헌적 가치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인 영향에 불과하다. 이 책에 수록된 표(表)·장(狀)·계(啓)·격(檄)·서(書) 등 온갖 체(體)의 글은 모두 사륙변려체(변려문)의 명문으로 되어 있어, 그 능숙한 형식미와 대장법(對仗法)의 묘는 독보적인 것으로서, 한시문(漢詩文)에 끼친 문학적 가치는 물론, 후세의 한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명저이다.

참고문헌

  • 김동준, 「귀국기 최치원 한시의 자부(自負)와 장심(壯心)에 대하여: 『계원필경』 권20에 수록된 한시 30수에 대한 독해」, 『진단학보』 112호, 진단학회, 2011.
  • 김복순, 「중국내의 최치원 유적과 『계원필경』」, 『동악미술사학』 제2호, 동악미술사학회, 2001.
  • 왕추정, 「최치원의 『계원필경』 소재 한시 연구」, 전남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0.
  • 홍우흠, 「『계원필경』 소재 최고운(崔孤雲) 병문소(騈文小)」『안동한문학논집』 2, 안동한문학회,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