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춘전(景春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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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에 있는 침전.

개설

경춘전(景春殿)은 1483년(성종 14)~1484년(성종 15)에 조성된 창경궁에 있는 건물로 여러 왕과 왕비의 침전(寢殿)으로 사용되었다. 추존왕인 덕종(德宗)의 비(妃) 소혜왕후(昭惠王后), 숙종비(肅宗妃) 인현왕후(仁顯王后), 장헌세자빈(莊獻世子嬪)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가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한편 장헌세자와 혜경궁 사이의 의소세손(懿昭世孫)과 정조, 추존왕 익종(翼宗)과 신정왕후(神貞王后) 사이의 헌종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숙종, 영조, 장헌세자, 순조는 이곳에 머물며 정치적 활동을 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6년(광해군 8)에 중건되었으며, 1830년(순조 30)에 또 화재로 소실되었다. 재건된 것은 1834년(순조 34)으로 현재 창경궁에 있는 경춘전은 이때의 모습을 유지한 것이다.

위치 및 용도

경춘전은 창경궁 명정전(明政殿) 뒤편에 있는 건물로 왕과 왕비가 사적 생활을 영위하던 침전 건물이다.

변천 및 현황

경춘전은 1483년(성종 14)~1484년(성종 15)에 조성된 창경궁 영역 내에 건립된 침전 건물이다. 제일 먼저 경춘전을 침전으로 사용한 사람은 인수대비(仁粹大妃)로 알려진 추존왕 덕종의 비인 소혜왕후이다. 이곳에서 생활하던 소혜왕후는 죽음도 이곳에서 맞이했다(『연산군일기』 10년 4월 27일).

경춘전은 임진왜란 당시 경복궁·창덕궁·창경궁, 세 궁궐에 한성부 백성들이 불을 놓으면서 1차로 소실되었다. 복구된 것은 1616년에 광해군이 경복궁을 제외한 두 궁궐을 수리하면서이다. 이때의 경춘전은 명광전(明光殿)과 더불어 다른 침전 제도의 모범이 되었다(『광해군일기』 9년 4월 27일). 다시 지어진 경춘전은 숙종비인 인현왕후와 인원왕후(仁元王后)의 처소로 사용되면서 숙종의 침전이 되었다. 폐위되었다가 복위된 인현왕후는 이곳에서 승하하였다(『숙종실록』 27년 8월 14일).

영조 재위 기간 중에 이곳을 주로 사용한 사람은 혜경궁 홍씨로 그녀는 이곳에서 의소세손과 정조를 낳았다(『영조실록』 26년 8월 27일)(『정조실록』 즉위년 3월 10일). 정조는 즉위 후 혜경궁 홍씨를 위해 별도로 자경전(慈慶殿)을 지어 주었지만, 혜경궁은 효의왕후(孝懿王后)에게 자경전을 내어주고 경춘전에서 주로 생활하다가 81세에 이곳에서 승하하였다(『정조실록』 2년 2월 9일)(『순조실록』 15년 12월 15일). 혜경궁이 떠난 경춘전을 주로 사용한 것은 순조와 아들인 효명세자(孝明世子)이다. 효명세자빈인 신정왕후는 1827년(순조 27)에 이곳에서 헌종을 낳았다.

1830년(순조 30)에 경춘전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던 환경전(歡慶殿)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함인정(涵仁亭), 공묵합(恭默閤), 숭문당(崇文堂), 영춘헌(迎春軒), 오행각(五行閣), 빈양문(賓陽門)을 태우면서 경춘전도 함께 소실되었다(『순조실록』 30년 8월 1일). 재건된 것은 1834년(순조 34) 3월로 현판은 광주유수(廣州留守)김이재(金履載)가 썼다. 현재 창경궁의 명정전 뒤편에 있는 경춘전은 이때 재건된 건물이다.

형태

1834년에 재건되어 현재까지 유지되는 경춘전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규모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에는 건물의 격식을 살리기 위해 하얗게 양성바름하고 용마루 좌우 끝에는 용두를 설치했다.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고 온돌방 주변으로 퇴를 두는 전형적인 침전 형식의 건물이다.

1830년 이전의 경춘전은 「동궐도(東闕圖)」를 통해 추정해 볼 수 있다.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3칸이며 지붕 구성은 현재와 동일하다. 다른 점은 기단이 상당히 높아 건물 4면에 난간을 설치하고 목재 계단을 둔 것이다. 내부 공간 구성은 가운데에 대청을 두고 좌우에 온돌을 두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관련사건 및 일화

경춘전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은 혜경궁 홍씨이다. 이곳에서 의소세손과 정조를 낳았는데 정조를 잉태하였을 때 장헌세자가 용이 여의주를 안고 침실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는 꿈의 징조가 틀림없이 성자를 낳을 조짐이라 하면서 새하얀 비단에다 용을 그려 벽에다 걸어 두었다[『정조실록』 부록 혜경궁이 내린 행록].

1783년(정조 7)에 정조는 이 건물을 수리하면서 ‘탄생전(誕生殿)’이라는 편액을 붙이고 동쪽 벽에 있는 용 그림을 다치지 말게 할 것을 당부하는 기문(記文)을 썼다. 1805년(순조 5)에 순조도 혜경궁의 부탁을 받아 이에 대하여 기문을 써서 남겼다. 현재 정조가 쓴 『경춘전기(景春殿記)』와 순조가 쓴 『어제경춘전기(御製景春殿記)』는 서울대학교 규장각(奎章閣)에서 소장하고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경춘전기(景春殿記)』
  • 『궁궐지(宮闕志)』
  • 『내각일력(內閣日曆)』
  • 『어제경춘전기(御製景春殿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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