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신사(庚寅信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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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0년(선조 23) 조선에서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한 소문의 진위를 확인할 목적으로 파견한 통신사.

개설

1587년(선조 20) 풍신수길(豐臣秀吉)은 구주(九州) 평정 후 대마도주(對馬島主) 종씨(宗氏)에게 조선 왕의 입공(入貢)을 요구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종씨는 조선에 풍신수길의 전국 통일을 축하하는 통신사를 파견하도록 요청하였다. 조선에서는 풍신수길의 조선 침략 여부를 탐지할 목적으로 1590년(선조 23)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정사(正使)에 황윤길, 부사(副使)에 김성일, 서장관(書狀官)에 허성이 차출되었다. 경인통신사라고도 한다.

절차 및 내용

1585년(선조 18) 9월 풍신수길은 관백(關白)에 취임한 지 두 달 후, 처음으로 조선 및 중국을 정복하겠다는 뜻을 심복인 일류말안(一柳末安)에게 밝혔다. 1586년(선조 19) 6월 풍신수길은 구주 출병에 즈음하여 대마도주에게 서한을 보내 구주 출병에 이어 조선 정벌을 결행할 것이니 충성을 다하여 종군해야 할 것이라고 통보하였다. 대마도주 종의조(宗義調)는 가신 유천조신(柳川調信) 등을 풍신수길에게 보내 조선 출병 대신 조선에서 공물이나 인질을 보내게 하는 방법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풍신수길은 조선 왕이 직접 내조하지 않으면 즉시 출병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1587년 9월 종의조는 가신을 조선에 파견하여 풍신수길의 조선 왕의 직접 내조 요구를 숨기고 단지 전국 통일을 축하하는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였으나, 조선에서는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종의조는 풍신수길의 독촉으로 직접 가신들을 데리고 조선에 가서 통신사 파견을 재차 요청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몇 년 전 손죽도(巽竹島)를 습격하였던 왜적 압송 및 피로인 송환을 조건으로 통신사 파견을 결정하였다. 1590년(선조 23) 2월 손죽도를 습격한 왜적 및 피로인이 송환되었고 3월 6일 정사황윤길, 부사김성일, 서장관허성, 제술관(製述官)차천로, 사자관(寫字官)이해룡 등의 경인신사가 서울을 출발하였다(『선조실록』 39년 10월 16일).

경인신사는 1590년 5월 1일 부산을 출발하여 7월에 경도(京都)에 도착하였지만, 풍신수길의 오우(奧羽) 평정 등으로 조선 왕의 국서는 11월 7일에서야 전달되었다(『선조실록』 24년 1월 13일). 그 내용은 풍신수길의 일본 전국 통일을 축하하고 금후 양국의 우호관계를 공고히 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풍신수길은 자신의 일본 통일을 강조하고 명과 조선에 대한 본인의 향후 계획을 적은 답서를 주었다. 명에 대한 정복 의사가 분명히 표명되었고, 조선에게 그 선도 역할을 명하는 내용이었다. 김성일은 답서의 내용과 일부 표현에 항의하며 개서(改書)를 요구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1591년 2월 부산으로 돌아왔다.

경인신사의 귀국 후 조선은 일본이 명 침공을 실행에 옮길지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경인신사의 정사였던 황윤길과 부사였던 김성일은 상반된 보고를 하였고(『선조수정실록』 24년 3월 1일), 조선 조정에서는 당시 집건 동인(東人)의 입김이 작용하여 김성일의 의견을 받아들여 일본의 침략은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경인신사의 상반된 의견으로 조선 조정에서 의론이 분분한 당시, 일본의 유천조신은 ‘내년에 길을 빌려 조선을 침범할 것이다’라든지, ‘중국이 오랫동안 일본을 거절하여 조공을 바치지 못하여, 수길이 이 때문에 분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쌓여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 만약 조선이 먼저 주문(奏文)하여 조공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준다면 조선은 반드시 무사할 것(『선조수정실록』 24년 윤3월 1일)’이라고 하면서 이른바 가도입명(假途入明), 즉 명으로 가려 하니 길을 빌려 달라는 요구를 하였다. 또한 경인신사와 함께 조선으로 들어온 일본 사신들이 돌아간 이후에도 평의지(平義智)가 부산포에 와서 배에서 내리지도 않고 일본이 명과 통호하려고 한다면서 중국에 주문해 줄 것을 요구하면서 위협하였다(『선조수정실록』 24년 5월 1일). 이처럼 대마도에서는 조선에 가도입명을 요구하고 조선의 수락을 받아내려 하였으나 조선에서는 이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일본의 명 정벌 계획이 잘못되었다는 자세로 응수하였다.

한편 조선 조정에서는 통신사가 가져온 풍신수길의 명 정벌[征明] 계획, 조선에 대해 명 정벌의 길잡이 역할을 요구하는 정명향도(征明嚮導) 요구 등의 긴급한 사항을 명에 알려야 하는지에 관하여 논의하고) 있었다. 결국 명에 상주해야 한다는 의견이 채택되었지만, 1591년(선조 24) 7월경 성절사(聖節使)가 명에 들어갔을 때 이미 정명향도의 소문이 유구(琉球)를 경유하여 북경뿐만 아니라 요동 방면까지 퍼진 상태였다. 때문에 성절사는 북경에 도착하자마자 예부(禮部)에 해명 문서를 제출하는 등 분주하게 움직인 결과 명의 조선에 대한 의심은 일단 해소되어 11월 귀국하였다.

이처럼 경인신사가 귀국한 후 조선에서는 내부의 당쟁과 명에 대한 의심을 불식시키는 데 주력하느라 일본의 침략에 대해서는 충분한 군사적 대응책을 세우지 못한 채 전쟁을 맞게 되었다. 반면 그사이 풍신수길은 본격적으로 전쟁 준비를 추진하여 비전(肥前) 명호옥(名護屋)에 성하정(城下町)을 구축하고 1592년(선조 25)에는 정명 동원령을 발령하였다. 4월 12일 제1군으로 부산에 상륙한 종의지(宗義智)는 부산 첨사정발(鄭撥)에게 서한을 보내 가도입명을 요청하였으나 정발은 회답하지 않았다. 이에 일본군은 공격에 돌입하게 되고 부산성이 하루 만에 함락되면서 7년에 걸친 전쟁이 시작되었다.

참고문헌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9.
  • 『日本大百科全書』, 小學館, 1987.
  • 민덕기, 「경인통신사의 활동과 일본의 대응」, 『한일관계사연구』 43, 한일관계사학회, 2012.
  • 윤경하, 「임진왜란(壬辰倭亂) 직전 전쟁정보(戰爭情報)와 조선의 대응(對應)」, 『강원사학』 26, 2014.
  • 尹裕淑, 「임진왜란 발발전 한일교섭의 실태」, 『일본어문학회 국제학술대회 발표집』,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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