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의철도(京義鐵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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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고종 43)에 개통된 서울과 의주를 잇는 철도.

개설

고종의 아관파천 당시인 1896년(고종 33) 프랑스 피브릴사(Compagnie de Fiveslille)의 그릴에게 경의철도 부설권이 양여되었다. 1897년 독일이 산동반도 교주만(膠州灣)을 점령하고, 러시아가 이에 대항하여 1898년 여순·대련항을 조차하자, 국제 정세의 변화를 감지한 피브릴사는 경의철도 부설권을 일본에 매각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1899년 한국 정부는 계약 기간 3년 내에 피브릴사가 부설 공사를 시작하지 못하자 부설권을 환수하고, 박기종(朴其淙)이 설립한 대한철도회사(大韓鐵道會社)에 넘겨주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건설이 지지부진하자 1900년 이용익이 서북철도국(西北鐵道局)을 설치하여 경의철도 건설에 직접 나섰다. 일본은 경의철도 부설이 자금 곤란으로 여의치 않자 대한철도회사에 150,000원 차관을 제공하는 방법으로 경의철도에 대한 간접 지배를 실현시켰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경의철도의 속성 건설이 요구되었고, 일본 정부는 임시군용철도감부(臨時軍用鐵道監部)를 설치하여 1905년 4월 일단 개통시켰다. 경의선이 완전 개통된 것은 1906년 4월 3일의 일이었다.

내용 및 특징

고종의 아관파천 당시였던 1896년 7월 3일, 웨베르(Carl Weber) 공사의 지원하에 프랑스의 피브릴사 그릴(Grille)에게 정식으로 경의철도 부설권이 양여되었다(『고종실록』 33년 7월 3일). 계약 조건은 모스(J. Morse)의 경인철도와 동일했다. 이 소식을 접한 일본은 프랑스의 경의철도 부설권 획득 배경에 그들과 동맹 관계에 있는 러시아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러시아의 시베리아 철도와 프랑스가 부설권을 획득한 경의철도와의 연결 가능성에 대해 크게 우려했다. 1896년 9월 8일, 러시아와 청나라 사이에 동청철도(東淸鐵道) 부설 계약이 조인되어 러시아의 만주 진출이 표면화하자 일본의 우려는 기우에 그치지 않았음이 확인되었다. 더욱이 한국 정부가 기존의 표준궤도(4.85feet) 적용 결정을 바꾸어 11월에 광궤(5feet)로 변경하였다. 광궤는 일본이 계획 중인 경부철도의 표준 궤도가 아닌 러시아의 시베리아 및 동청철도의 궤도와 일치했기 때문에 일본의 우려는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이것이 경부철도에 영향을 주는 것이라 하여 한국 정부에 여러 차례 항의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1898년까지 경의철도 부설권에 기본적인 변화가 없었다.

변천

그런데 1898년을 전후하여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시아의 국제 정세에 미묘한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독일이 1897년 11월 산동반도의 교주만을 점령하자, 러시아가 이에 대항하여 1898년 3월 27일 여순·대련항과 부대 영토를 정식으로 조차하였고, 이어 5월 7일에는 동청철도상의 하얼빈과 요동반도를 연결하는 철도의 종점을 여순·대련으로 확정하였다. 7월 6일에는 이 철도의 명칭을 동청철도 만주지선으로 명명하고 조차지 내의 관세율 결정권까지 획득하였다. 이것은 러시아가 시베리아 철도의 부동항 종착지를 한반도에서 구하려고 했던 종래의 정책에서 후퇴하여 요동반도 남단에서 구했음을 의미했다. 따라서 러시아로서는 한반도에서의 철도 부설의 필요성과 긴급성이 시베리아철도와 동청철도 만주 지선에 비해 감소하게 되었다. 이런 국제 정세의 변화를 감지한 피브릴사는 경인철도 부설권 매각에서 막대한 이익을 챙긴 미국인 모스의 예를 따라 경의철도 부설권을 일본에 매각하려 하였다. 하지만 프랑스 공사로부터 매수 교섭을 제의받은 일본은 프랑스의 요구 조건이 너무 과중하다는 이유로 제의를 거절하였다.

경의철도 매각 조치에 시종일관 반대 의사를 밝혀온 한국 정부는 프랑스 측의 경의철도 기공 기한 연장 요구를 거절하고, 약속된 3년이 지나면 부설권을 돌려받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실제로 피브릴사가 계약 기한 3년 내에 부설 공사를 시작하지 못하자, 1899년 6월 3일 경의철도 부설권을 다시 대한제국에 환속시키고, 이를 계기로 경의철도의 자력 건설 방침을 결정했다. 7월 3일에는 실제로 피브릴사의 경의철도 부설권을 박탈하였다(『고종실록』 36년 7월 3일).

한국 정부는 곧이어 경의철도의 부설권을 박기종이 발기한 대한철도회사에 넘겨주었다. 하지만 건설이 지지부진하자 이듬해 1900년 9월에 이용익이 주도하는 서북철도국을 설치하여 경의철도의 건설에 직접 나섰다. 서북철도국은 앞서 피브릴사와 부설권 소멸에 따른 약속에 따라 프랑스인 기사를 고용하여 기술 원조를 받을 수 있었지만, 해관 수입을 저당하여 프랑스로부터 자재를 구입한다는 조건은 거절당했다. 그럼에도 서북철도국이 경성-개성 간의 측량에 착수하여 1901년 7월까지 측량 작업을 완료시킨 것만은 사실이다.

일본은 한국 정부의 자력에 의한 경의철도 부설이 자금 조달 곤란 등으로 여의치 않을 것을 간파하고 계속해서 경의철도 부설권 획득을 기도했다. 하지만 이러한 일본의 움직임은 러시아의 문호폐쇄정책(門戶閉鎖政策)에 영향을 줘서 결국 러·일 사이의 대립을 낳는 결과를 초래했다. 왜냐하면 경의철도의 종착지인 의주가 러시아의 안봉철도(安奉鐵道)의 종착지인 안동과 국경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러·일 양국의 철도 계획상 중요한 지점이기도 했지만, 러시아의 용암포(龍巖浦) 조차에 대항하여 일본이 개시(開市)를 요구한 지역이기도 했다. 일본 정부는 대외적으로 영일동맹을 활용하여 일본의 국제적 지위를 향상시켜 러시아를 견제하는 동시에, 경의철도 부설권 획득과 차관 공여 계획을 연계시켜 한국에서 확고한 우위를 확보하려는 방침을 굳혔다.

그러나 이러한 고무라구상[小村構想]은 좌절되었다. 1902년 10월 8일 러시아가 만주에서 제1차 철병 약속을 이행하고, 경의철도 부설권을 노리고 한국 정부에 새로운 차관 제의를 해왔기 때문이다. 이에 일본은 1903년 2월 17일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공사를 통해 러시아에게 경의철도 부설권을 주는 것은 극동의 안전 보장 문제와 관련된다는 점에서 묵과할 수 없다는 뜻을 한국 정부에 통고했다. 아울러 만약 경의철도 부설권을 외국에 양여할 경우 일본이 첫 번째 교섭 대상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 결과 한국 정부는 2월 20일 자체 건설을 구실로 러시아의 요구를 거절했다.

1903년에 들어 일본은 러시아의 용암포 및 의주 진출에 대해 강경 노선으로 대응했다. 러시아의 용암포 조차지 확보를 저지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의주 개시와 경의철도 확보 방침을 연계하여 강경 노선으로 선회한 것이다. 이때부터 한국 정부에 대한 위압이 본격화하였다. 그 결과 한국 정부는 7월 18일 러시아에 대해 경의철도의 자력 부설 방침을 재차 표명한 후 러시아의 요구를 최종 거절하였다. 그리고 7월 30일 대한철도회사에 허가장을 인가하였고, 8월 19일에는 서북철도국과 대한철도회사 사이에 공사 계약도 체결되었다. 여기서 일본의 150,000원 차관 제공을 통한 경의철도 간접 지배 방안이 나왔다. 이해 9월 8일 일본 측과 대한철도회사 사이에 150,000원의 대출금을 전제로 한 출자 계약이 성립된 것이다. 결국 일본의 경의철도 부설권 획득 기도는 대한철도회사와의 출자 계약의 형식으로 실현된 것이다.

이후 경의철도는 러일전쟁의 발발과 함께 일본 군대가 군용 철도로서 속성으로 건설했다. 일본 정부는 러시아에 선전포고하기 직전인 1904년 2월 9일에 참모본부·외무·육군·체신 등 각성의 총의로 일본군 산하의 철도대대와 5개 공병대대를 주력 부대로 하는 임시군용철도감부(臨時軍用鐵道監部)를 설치하기로 결의하고, 이해 3월부터 이들을 한국에 상륙시켜 경의철도의 부설 공사에 착수하도록 했다.

경의철도의 속성 건설은 일본 조야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경의철도의 노선 선정 작업은, 10여 년을 두고 5차례에 걸쳐 대대적으로 실시되었던 경부철도와 달리 전쟁 도발 후 3개월 사이에 311마일에 달하는 경의철도의 모든 노선을 일단 선정하기에 이르렀다. 속성을 위주로 한 경의철도 공사는 임시군용철도감부가 총괄적인 감독을 맡고 철도대대가 선로의 측량·궤조(軌條)의 부설·교량의 가설을 담당하며, 공병대대는 노반공사(路盤工事)를 전담하는 방식으로 추진되었다.

공사의 강행에 의하여 경의철도의 모든 구간은 청천강(淸川江)·대령강(大寧江) 등의 철교를 제외하고는 1905년 4월 말일까지 일단 개통되어 용산-신의주 간의 열차 운행이 시작되었다. 비록 그것이 1/40 이하의 경사면 기울기[勾配]와 8체인[鎖] 이하의 곡선 반경을 많이 채용하고 목조 교량을 가설하여 겨우 22톤 차 3량이 통과할 정도의 부실 공사였다 할지라도, 500여㎞에 달하는 방대한 철도망을 약 1년 동안에 완공하였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철도 건설비 또한 경부철도에 훨씬 못 미치는 1마일 평균 61,000원에 그쳤다. 하지만 경의철도가 임금과 물가가 폭발적으로 앙등하고 재료의 공급이 불충분한 전쟁 기간에 부설되었음에도 경부철도보다도 저렴한 가격으로 단시일에 공사가 완공되었다는 사실은 철도 공사를 실제로 담당하였던 한국인에 대한 일본의 수탈과 탄압이 얼마나 가혹했었나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후 경의선 철도가 선로를 보수하고 교량을 놓아 완전히 개통된 것은 1906년 4월 3일의 일이었다(『고종실록』 43년 4월 3일).

그러나 경부·경의철도의 관할권을 넘겨받은 한국통감부 철도관리국은 경의철도의 전면적 개축 공사를 실시해야 했다. 경의철도가 전쟁 기간에 속성으로 이루어진 탓에 부실 공사로 점철되었기 때문이다. 개축 공사는 1905년부터 1911년까지 압록강 교량 건설비를 포함하여 2,000만원의 예산으로 진행되었다.

참고문헌

  • 김원수, 「일본의 경의철도 부설권 획득기도와 용암포사건-러·일 개전과 관련하여」, 『한일관계사연구』9, 한일관계사학회, 1998.
  • 정재정, 「경부·경의철도의 부설과 한·일 토건회사의 청부공사활동」, 『역사교육』37·38, 역사교육연구회, 1985.
  • 정재정, 「경의철도의 부설과 일본의 한국종관철도 지배정책」, 『논문집』제3집, 한국방송통신대학,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