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신사(京城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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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이후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을 위해 남산 근처에 건립한 신사.

개설

경성신사(京城神社)는 식민지 시기 경성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위해 건립한 대표적인 종교 시설이었다. 1915년 7월 1일 경성신사씨자규약(京城神社氏子規約)이 실행되면서부터 1925년 조선신궁(朝鮮神宮)이 완성될 때까지 국가 제사를 대행하였다. 조선신궁이 신사의 대표적 지위를 차지하면서, 경성신사는 식민지 조선의 국가 제사를 거행하는 기관에서 경성 부민을 위한 제사를 거행하는 기관으로 변모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898년(고종 35) 경성(京城)에 체류하던 일본인들을 위한 경성신사가 창건되었다. 경성 주재 일본 공·영사와 일본에서 오는 고관대작은 반드시 경성신사에 들러 참배하였다.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에는 공식적인 제사에 매번 통감을 비롯한 고등관들이 참배하였고, 일본 황실에서도 참배를 하였다. 1907년 10월 훗날의 다이쇼천황[大正天皇]이 방문하여 참배했고, 1909년에는 훗날 영친왕의 장인인 나시모토 노미야[梨本宮王]가 참배하기도 했다.

반면 대한제국의 국가 제사는 1908년 7월 23일 칙령 제50호인 향사이정건(享祀釐正件)이 반포된 후 폐지되었다. 1915년 경성신사의 제전이 정비된 후 1916년부터는 일본의 황조신(皇祖神)인 아마테라스[天照大神]를 모신 경성신사에서 국가 제사가 거행되었다.

조직 및 역할

경성신사에서는 국가 제사는 물론 황실의 안녕, 일본 군대의 무운장구, 전염병 방지 등을 기원하거나 기우제, 초혼제를 지내는 등의 역할을 하였다.

변천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 고종과 순종이 제전의 비용으로 400원을 내리기도 하였다(『순종실록부록』 9년 10월 13일).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훼철되었다.

참고문헌

  • 김대호, 「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동북아역사재단, 2008.
  • 김승태, 「일본신도의 침투와 1910·1920년대의 신사문제」, 『한국사론』16, 1987.
  • 문혜진, 「1910-1925년 경성신사의 제사-경성신사 제전과 제신의 식민지적 성격을 중심으로-」, 『종교연구』제72집, 2013.
  • 박규태, 「국가신도란 무엇인가」, 『종교연구』29, 2002.
  • 최석영, 「한말 일제 강점기 국가 제례 공간의 변화」, 『한국사연구』118,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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