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전(景福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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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의 세 번째 왕후인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金氏)를 위해 경종이 창덕궁에 조영한 대비전.

개설

숙종의 첫째 왕후인 인경왕후(仁敬王后)가 승하한 후 맞은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후사가 없을 때인 1688년(숙종 14), 희빈장씨(禧嬪張氏)가 아들을 낳자 숙종은 세 살배기 어린아이를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 후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하여 사가(私家)로 쫓고 희빈장씨를 중전에 봉했다. 그러나 5년 뒤, 인현왕후를 다시 복위한다면서 희빈장씨가 아직 폐위되지 않은 상황에서 인현왕후를 ‘경복당(景福堂)’으로 맞아들였다(『숙종실록』 20년 4월 11일).

1701년(숙종 27), 잦은 병증에 시달리던 인현왕후가 승하하고, 이 일이 희빈장씨의 저주 때문이라고 이어지며 희빈장씨 일족이 처형되었다. 다음 해 숙종은 16세의 인원왕후를 세 번째 왕비로 맞이하였다. 자신보다 한 살 많은 어머니를 모시게 된 경종은 궁궐에서 고립무원의 처지였다. 경종이 왕위를 이어받았을 때, 인원왕후는 34세의 젊은 대비로 왕실의 가장 웃전이 되었다.

경종이 즉위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주변 신료들은 훗날 영조가 되는 동생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해야 한다며 압박하였다. 대비는 이 일을 재가(裁可)하며 영조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이 일로 경종과 인원왕후의 관계는 더욱 소원해져 갔는데 그 와중에 왕의 측근인 환관이 왕세제를 시해하려 했다는 사건이 터졌다. 대비는 왕세제를 감쌌고 경종의 입지는 더욱 어려워졌다(『경종실록』 1년 12월 22일). 당시 대비와 여론이 왕세제 쪽으로 기울던 시기에, 인현왕후의 복위 장소인 ‘경복당’을 새로 조영하여 ‘경복전’으로 높이고 경종은 인원왕후에게 대비전으로 헌정하였다[『경종실록』 경종대왕묘지문].

위치 및 용도

효종 시기, 창덕궁의 서편을 확장하여 장대한 규모의 만수전(萬壽殿)을 조성하고 장렬왕후(莊烈王后)의 전각으로 삼았다. 지금의 구 선원전(璿源殿), 양지당(養志堂)에서부터 그 북쪽 영역이다. 「동궐도(東闕圖)」에서 보면 인정전(仁政殿) 서쪽, 선원전과 양지당부터 경복전 터까지 전체 영역이고 이곳을 ‘서궁’이라 불렀다. 경복전은 서궁 영역 중 가장 북쪽이고 인정전의 북서쪽, 수정전(壽靜殿)의 남서쪽에 해당된다. 경복전은 만수전의 옛터이면서 경복당이 포함되어 있던 자리에 조성되었다. 16~17세기에는 당대의 왕이 대비의 전각을 건립하고 연향을 올려 대비를 위로하였는데, 경복전 역시 그러한 배경으로 인원왕후를 모신 ‘대비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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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및 현황

경종은 1722년(경종 2), 숙종의 상을 벗는 때를 즈음해 전례대로 대비에게 존호를 올리고 연향을 베풀려 경복전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인원왕후는 연향을 반대하였고 때문에 잔치 의식을 치르지는 못하였다.

『경종실록』의 부록 가운데 「경종대왕 묘지문」에 의하면, 왕이 만수전 옛터에 있던 경복당을 수영(修營)하여 편호를 경복전으로 바꾸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경종실록』 부록 중 ‘경종대왕 행장’에는 만수전 옛터에 경복전을 ‘새로 지어서’ 왕대비를 모셨다고 되어 있다. 즉, 경복당을 확장·보수하였으며 만수전 옛터를 침범하는 규모로 조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관련 사실을 『조선왕조실록』과 문헌의 다른 곳에서는 찾기가 어려워 확정하기는 어렵다.

경복당은 만수전이 조성되기 전부터 있었던 건물이었다. 1687년(숙종 13)의 화재로 소실된 만수전 영역은 더 이상 복원되지 않았다(『숙종실록』 13년 9월 2일). 그러나 1694년(숙종 20) 경복당으로 인현왕후가 들어온 것을 보면, 그때의 화재에도 건재하였던 것 같다. 이후 인현왕후를 치료하던 거처로, 왕의 시어소로 활발히 사용되던 ‘경복당’을 인원왕후의 대비전으로 만든 것은 1722년(경종 2) 9월이었다. 정조, 순조 때까지 정순왕후(貞純王后), 효의왕후(孝懿王后)의 대비전으로 쓰이다가 1824년(순조 24) 소실되면서 사라졌다(『순조실록』 24년 8월 24일).

형태

「동궐도」를 살펴보면 경복전의 터만 남아 있어 정확한 형태를 알기는 어렵다. 하지만 옛터에 남아 있는 기단과 초석의 규모를 살펴보았을 때 추정할 수는 있다. 정면 9칸, 측면 3칸의 작지 않은 집이었으며 동·서 양쪽 끝에서 두 칸씩 앞으로 내민 익각을 가진 ‘┏┓’형 집이었고 중앙에 앞으로 길게 나온 월대를 두었다. 주변에는 연못과 정자 등, 부속 건물을 잘 갖춘 아름다운 전각이었던 듯하다. 비록 전각의 기초만 표현되어 남아 있지만, 이 당시 조영되었던 다른 대비전들과 마찬가지로 독립된 마당과 담으로 영역을 둘러싸고 있으며 연향 등의 예제(禮制)를 치를 수 있게 월대와 중앙의 넓은 대청을 갖춘 전각이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 『일성록(日省錄)』
  • 『궁궐지(宮闕志)』
  •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 『동문선(東文選)』
  • 『만기요람(萬機要覽)』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홍재전서(弘齋全書)』「동궐도(東闕圖)」
  • 조옥연, 「조선 궁궐의 동조건축에 관한연구: 17~18세기 동궐을 중심으로」, 경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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