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도(京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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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세 시기의 수도이자 현재 경도부의 부청 소재지.

개설

일본 경도부(京都府)의 부청 소재지로 11개구로 나누어지며, 경도분지와 분지를 동쪽·서쪽·북쪽으로 둘러싼 산지에 걸쳐 있었다. 근기 지방의 중심 도시이다. 경도(京都)라는 지명은 ‘수부(首府)’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794년 환무천황(桓武天皇) 때 처음으로 일본의 도읍지가 된 이후 통치와 경제의 요지로 중시되었으며, 명치유신(明治維新)과 함께 동경(東京)으로 천도하기까지 1,100여 년간 일본의 수도였다. 경도에는 평안신궁(平安神宮)과 함께 1,534개의 사찰과 245개의 신사(神社)를 비롯해 많은 유적이 있었다. 서진직(西陣織)으로 알려진 염직공업이 전통적으로 발달하였고 청수(淸水) 도자기의 산지였다. 판신(阪神) 공업지대의 중심지이면서 관광도시였다. 1,500,000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었다.

명칭 유래

동아시아에서는 역사적으로 최고 통치자가 거주하는 도읍, 수도를 의미하는 보통명사로 경(京)·경사(京師)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였다. 일본에서는 고대의 수도를 지칭하는 일반 명칭이었는데, 후에 구 평안경(平安京)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말하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비조경(飛鳥京)·공인경(恭仁京) 등이 경도라고 불렸으나 현 경도의 명칭은 평안시대 후기부터 불렸으며, 이후 점차 경의도[京の都]·경·경도가 도시의 고유명사처럼 정착되었다.

형성 및 변천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경도분지에 위치하였다. 경도가 본격적으로 개발되어 도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5세기 후반이었다. 한반도 남부에서 건너온 도래인(渡來人)들이 그곳에 정착하여 제방을 쌓아 저수지를 만들고 벼농사를 지었는데, 이들 집단 가운데 대표적인 세력이 진씨(秦氏)였다.

794년 환무천황은 화기청마려(和氣淸麻呂)의 건의를 받아들여 수도를 평안경으로 옮겼다. 오늘날의 경도부 경도시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평안경은 중국의 풍수에 따라 설계된 도시였다. 중국의 장안성을 모델로 하여 동서 4.5㎞, 남북 5.2㎞의 장방형으로 구획되었으며, 북단 중앙에 궁성인 대내리(大內裏)를 설치하였고, 시가의 중심에는 주작대로를 두어 대로 좌우에 좌·우경을 두었다. 도시설계에서도 볼 수 있듯이 평안시대는 견당승(遣唐僧)을 통하여 당의 문물이 일본에 전파되는 등 당풍(唐風) 문화의 최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다.

400년 동안의 평안시대 이후 겸창(鎌倉), 실정(室町), 강호(江戶) 막부(幕府)와 같은 무가정권이 성립하여 천황의 정치적 권한이 막부로 흡수되면서 경도는 정치적인 기능을 상실하고, 상대적으로 경제적인 기능이 강화된 경제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 무가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경도를 중심으로 새로운 세력이 규합, 공인되었기 때문에 정치적 위상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남북조시대에 경도 쟁탈전이 벌어져 남조가 4회에 걸쳐 경도 점령을 시도하였지만, 모두 족리(足利)군에게 격퇴당하였다. 1392년 남북조를 통일한 실정막부의 3대 장군 족리의만(足利義滿)은 장군의 저택을 경도의 실정 구역으로 옮겨 짓고 정치를 행함으로써 막부 체제를 정비하고 안정시켰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도 명의 책봉 체제에 들어감으로써 명과의 무역이익을 독점하는 한편 대륙의 신문화를 수입할 수 있었다. 이로서 족리의만은 실정전(室町殿)이라고 불렸으며, 이후에 족리 가문의 장군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호칭이 되었다.

1467년 응인의 난(應仁の亂)이 일어나자 경도는 주요 전쟁터가 되었고, 그 대부분이 황폐하였다. 이후 직전신장(織田信長)과 풍신수길(豊臣秀吉)에 의하여 다시 부흥하였는데, 특히 풍신수길은 자신이 머물 성으로 취락제(聚樂第)를 건설하고 내리(內裏)를 수리하였다.

1603년 3월 덕천가강(德川家康)이 장군(將軍)에 올라 강호막부가 탄생하면서 정치의 중심부가 강호(江戶: 현 동경)로 옮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경도는 수도였고 또한 막부의 거점으로 이조성(二条城)이 축조되었다. 강호시대의 경도는 문화와 공예의 중심지로서 인구가 50만(500,000)명이 넘는 도시로 정치의 중심지인 강호나 경제의 중심지인 대판(大阪)과 함께 일본 3대 도시가 되었다. 강호막부는 경도를 관리하는 관직인 경도소사대(京都所司代), 경도정봉행(京都町奉行)을 설치하고 막부 직할에 두었다.

경도는 조선 왕이 일본 막부 장군에게 보낸 통신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조선전기 최초의 통신사라고 일컬어지는 1429년 통신사(정사박서생(朴瑞生))를 비롯하여 1439년(세종 21) 통신사, 1443년(세종 24) 통신사가 경도에서 실정막부의 장군을 만났으며(『세종실록』 25년 10월 13일), (『세종실록』 26년 윤7월 22일), 1590년(선조 23) 황윤길(黃允吉)·김성일(金誠一) 등 경인통신사(庚寅通信使) 일행은 경도의 복견성(伏見城)에서 당시 최고 통치권을 장악하고 있던 풍신수길을 직접 만났다. 조선후기에 해당하는 강호막부 때에는 막부의 요청으로 일본에 파견된 열두 차례의 통신사행(회답 겸 쇄환사 3회 포함)이 경도를 거쳐 갔다. 그 과정에서 통신사행에 참여한 문사들과 일본 지식인들 간에 교류가 활발하였다.

1867년 명치유신으로 대정봉환(大政奉還)이 이루어지고 통치권이 막부로부터 경도의 조정으로 반납되면서 일본은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입헌적 정치 체제가 갖추어지게 되었다. 1868년에 경도에 경도부(京都府)가 설치되고, 같은 해 7월 명치천황은 강호를 동경으로 개칭하는 조서를 발표하고 10월에 강호성으로 입성하였다. 이로써 면서 동경이 일본의 공식적인 수도가 되었고, 경도는 8세기 이래 지속되었던 수도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경도는 복견시(伏見市)를 시작으로 주변 지역을 편입하였기 때문에 강호시대 이전의 전통적인 경도의 범위는 현재 경도 시내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경도에는 경도어소(京都御所)·이조성·계이궁(桂離宮)을 비롯하여 동본원사(東本願寺)·서본원사(西本願寺)·금각사(金閣寺)·남선사(南禪寺)·청수사(淸水寺)·평안신궁(平安神宮)과 같은 유서 깊은 유적들이 자리하고 있어 여전히 문화도시로서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

참고문헌

  • 이쿠타 사토시 등 저, 야마모토 히로후미 감수, 이재석 옮김, 『교양인을 위한 일본사』, 청어람미디어, 1999.
  • 정재정, 『교토에서 본 한일통사』, 효형출판, 2007.
  •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84.
  • 京都市編, 『京都の歷史』, 學藝書林, 1976.
  • 三宅英利, 『近世日朝關係史の硏究』, 文獻出版,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