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덕궁(慶德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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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창덕궁과 함께 국왕의 치소(治所)로 운영된 왕궁.

개설

경덕궁은 1617년(광해군 9) 6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3년 5개월 만인 1620년(광해군 12) 11월에 완공되었다. 처음에는 서별궁(西別宮)으로 부르다가 공사 도중인 1617년 7월에 궁호(宮號)를 경덕궁(慶德宮)으로 정하였으며, 1760년(영조 36)에는 경희궁(慶熙宮)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숙종과 영조가 장기간 머물면서 창덕궁에 버금가는 왕궁으로 발전하였으나, 정조 이후에는 크게 활용하지 않았다. 1829년(순조 29)에 발생한 화재로 침전과 편전 일곽이 소실되었으나 곧 복구되었다.

고종 초기에는 상당수의 건물과 시설을 헐어 경복궁 중건에 활용하는 바람에 공궐(空闕)로 바뀌어 개화 정책을 실험하는 장소로 변모되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를 전후하여 일본인을 위한 경성중학교가 세워지면서 완전히 파괴되었다. 1980년대 이후 서울역사박물관 건립을 위한 발굴 조사가 시행되면서 정전 일곽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속칭 서궐(西闕), 새문안 대궐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위치 및 용도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에 있다. 조선후기 사용된 궁궐 가운데 하나이다.

변천 및 현황

경덕궁 창건 계획이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은 1617년 6월의 일이다. 이보다 2년 앞서 1615년(광해군 7)에는 창경궁을 중건하였는데, 이 공사에서 쓰고 남은 자재를 인왕산 아래로 옮겨 놓았다. 사직단 동쪽에 새로운 궁궐인 인경궁(仁慶宮)의 창건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광해군은 창경궁 수리를 맡았던 선수청(繕修廳)을 선수도감(繕修都監)으로 확대·개편하여 새로운 궁궐 창건을 준비하였다. 1617년 공사 시작을 앞두고 선수도감을 다시 영건도감(營建都監)으로 바꾸어 본격적인 궁궐 창건에 대비하였다. 바로 이 영건도감의 지휘 아래 인경궁과 경덕궁의 창건 공사가 진행되었다. 두 궁궐이 동시에 건립되는 것을 막으려는 상소가 빗발쳤으나 1620년 11월에 경덕궁이 먼저 완공되었다. 인경궁 공사는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왕위에서 쫓겨나자 중단되었다.

인경궁이 처음부터 큰 규모의 궁궐로서 창덕궁의 제도를 전범으로 삼았던 것과는 달리, 경덕궁은 인경궁에 견주어 작은 궁궐인 소궐(小闕)로 불리면서 창경궁의 제도를 모방하여 계획되었다. 정문을 단층으로 지었고, 정전(正殿)인 조하전(朝賀殿)과 편전(便殿)인 시사전(視事殿)을 모두 창경궁의 제도에 따라 정하게 하였다(『광해군일기』 9년 7월 29일). 그러나 1618년(광해군 10) 4월에 영건도감에서 올린 계를 보면, 경덕궁 아문의 칸수만 203칸에 이르렀다. 당초에는 잠시 피해 있을 곳으로 지으라던 경덕궁이 법궁(法宮)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많은 아문을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광해군일기』 10년 4월 4일). 또 같은 달 영건도감에서 올린 계를 보면, 경덕궁 내 당실(堂室)의 조영에 쓴 재목의 치수는 인경궁의 경우와 대개 같았다(『광해군일기』 10년 4월 24일).

1619년 9월에는 다음과 같이 공사가 진척되었다. 첫째, 대내(大內) 정전·동궁·침전·나인입접처(內人入接處) 등 1,500칸이 완공되었다. 둘째, 동이별전(東二別殿)과 서별전(西別殿), 초수별당(椒水別堂) 등은 토맥이 단단하고 지세 또한 좋은 곳에 지어졌다.

한편 궁성(宮城)은 1617년 7월에 동서남북의 경계를 정하였으며, 이때의 궁성 영역은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서궐도안(西闕圖案)」과 일치하는 듯하다. 이는 현재의 행정 구역상 신문로 일대와 일치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1618년 10월에는 경덕궁과 인경궁의 돌난간 공사와 함께 이듬해부터 인왕산에 성첩(城堞)을 쌓도록 하달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이때 두 궁궐을 함께 지으면서 서로 연결하기 위하여 인왕산 성첩을 신축하거나 보수할 계획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광해군일기』 10년 10월 7일).

반정(反正)으로 왕위에 추대된 인조는 경운궁에서 즉위한 뒤에도 새로운 궁인 경덕궁이나 인경궁으로는 옮기지 않았다. 그러나 반정 당시인 1623년(광해군 15)에 창덕궁이 불타 버렸고, 이듬해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마저 불타 버렸다. 난이 평정된 뒤인 1624년 2월에 인조는 처음으로 경덕궁에 들게 되었으며, 경덕궁은 이때부터 궁궐로써 구실을 하게 되었다.

이후 역대 왕이 번갈아 경덕궁에서 집무하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1656년(효종 7)에 경화당(景和堂)과 만상루(萬祥樓)를 헐어 창덕궁 춘휘전(春暉殿)과 만수전(萬壽殿)을 세웠다. 1667년(현종 8년)에는 융복전(隆福殿) 남쪽의 집희전(集禧殿)을 헐어 창덕궁 집상전(集祥殿)을 세웠고, 숙종 때는 대대적으로 수리를 벌였다. 영조 때는 태녕전(泰寧殿)경봉각(敬奉閣)을 세웠다. 그 가운데 가장 큰 공사는 창건 70여 년 만인 1693년(숙종 19)에 벌어진 수리 공사였다. 이때 융복전, 회상전(會祥殿), 광명전(光明殿), 단명전(端明殿), 승휘전(承輝殿), 영소전(永昭殿), 사물헌(四勿軒), 경헌당(鏡憲堂), 무일합(無逸閤), 예연당(蘂淵堂), 용비루(龍飛樓), 영취정(暎翠亭) 등 대부분의 건물이 보수되었다. 숙종은 오랜 기간 경덕궁에 머물러 있으면서 궁궐 내 여러 곳을 수리하거나, 건물의 이름을 변경하였다.

영조 또한 오랜 기간 경덕궁에 거처하였는데, 1730년(영조 6)에 자정전(資政殿) 서행랑 5칸을 중수하고 우문각(右文閣)이라 이름 지어 경연 장소로 사용하였다. 1732년(영조 8)에는 흥정당(興政堂) 동쪽과 숭양문(崇陽門) 북쪽에 있는 오래된 행각 3칸을 개조하였다. 그리고 이곳에는 숙종 때 만들어 보관해 오던 천문 관측기구를 설치하고 규정각(揆政閣)이라 이름 지었다. 1733년(영조 8)에는 태녕전(泰寧殿)을 새로 지어 역대 국왕의 영정을 모셨다. 1764년(영조 40)에는 궁궐의 이름을 경덕궁에서 경희궁으로 바꾸었으며, 경봉각(敬奉閣)을 창건하여 청국에서 온 조서와 칙서를 보관하게 하였다. 흥정당 남쪽의 주합루(宙合樓)와 존현각(尊賢閣)도 이때 지어진 것이다. 정조는 경덕궁 동궁에 거처하던 세손(世孫) 시절인 1774년(영조 50)에 『정묘어제경희궁지(正廟御製慶熙宮誌)』를 저술하였는데, 여기에는 1620년(광해군 12) 창건 이후 그때까지 변화·발전되어 온 경덕궁의 모습이 총체적으로 담겨 있다.

그런데 1829년(순조 29) 10월 3일에 일어난 화재로 회상전·융복전·흥정당(興政堂)·정시합(政始閤)·집경당(集慶堂)·사현합(思賢閤) 등 내전과 편전 일곽 대부분이 불타 없어졌다(『순조실록』 29년 10월 3일). 화재 이후 중건 공사는 1830년(순조 30) 3월에 시작되어 1831년(순조 31) 4월 27일에 낙성되었다. 이때 편찬된 기록인 『서궐영건도감의궤(西闕營建都監儀軌)』를 통하여 당시의 영건 상황을 여러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건물이 한 채도 남아 있지 않은 오늘날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경덕궁은 이후 헌종·철종대에는 큰 변화 없이 관례에 따라 수시로 보수되었다.

「서궐도안」을 통해서나마 19세기 전반에 건설된 경희궁 건축의 장관을 대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고종 초기에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경덕궁의 위상은 격하되었고, 숭정전(崇政殿)·회상전·정심합·사현합·흥정당 등 중심 건물만 남기고 대부분의 건물을 헐어 경복궁 건물을 중건하는 데 활용하였다. 고종과 순종 연간에 경덕궁은 더 이상 왕궁이 아니었으며 궁내 공터를 용동궁(壽進宮)·어의궁(於義宮)·명례궁(明禮宮)·용동궁(龍洞宮) 등 4개 궁방에 분배하여 개간·경작하도록 하였다.

1875년(고종 12)에는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고 접견하는 외교적인 행사가 숭정전과 흥정당에서 거행되었고, 이후에도 중심부는 정부에 의하여 유지·보수되었다. 그러나 1883년(고종 20) 양잠소를 설치하고 뽕나무를 심어 궁역 대부분은 양잠 정책의 실험장으로 활용되었다. 대한제국기인 1897년(광무 1)에는 정문인 흥화문(興化門) 안쪽에서 수천 명이 열병식을 할 수 있도록 지대를 평탄화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고종황제의 위용을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한 관병식을, 경운궁과 가까운 거리에 있던 경덕궁에서 거행하기 위해서였다. 1902년(광무 6)에는 고종황제 즉위 40주년 기념 칭경예식(稱慶禮式)을 경덕궁에서 거행하기 위하여 경덕궁 내 전각을 수리하였다.

그러나 1905년(광무 9)의 을사늑약으로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된 이후 경덕궁은 사교 장소로 전락하였다. 통감부가 주최하는 다양한 용도의 대규모 행사, 예컨대 각종 학교 운동회, 친목회, 동창회 등을 경덕궁에서 열었다. 1910년(융희 4) 8월 28일의 강제적인 한일합방으로 인하여 경덕궁도 조선총독부 소유로 넘어갔다. 합방 2년 전부터 일본인 거류민이 다닐 학교를 세운다는 구실로 궁터의 서쪽을 정지(整地)하더니 1909년(융희 3)에는 통감부중학교(統監府中學校)를 세웠다. 그 결과 경덕궁은 숭정전·회상전·흥정당·흥화문·무덕문·황학정 등 건물 몇 채와 이에 딸린 부속 행각만을 남긴 채 파괴되었다. 정전·편전·대문 등 기본 골격만 남기고 모조리 헐어 없앴던 것이다. 이때 자연환경도 완전히 변형되었다. 낮은 데는 돋우어지고 높은 데는 깎여 나갔다. 궁궐 안에 설치되어 있었던 문화적 이기(利器)와 조경용(造景用) 시설 및 수목들도 모두 헐값에 방매·처분되었다. 1922년 6월에는 궁역 동쪽 땅 21,500평을 전매국 관사 부지로 팔아 넘겼다. 1927년부터 1928년에 걸쳐 궁역 남쪽 일부를 떼어 팔고, 그 앞에 이른바 신문로(新門路)를 내었다. 그 결과 1934년에 이르러 궁역은 41,319평으로 축소되었다.

이후 조선총독부에서는 합방 당시까지는 남아 있었던 건물마저 모두 팔아넘겼다. 정전인 숭정전은 1926년에 조계사로, 왕의 침전인 회상전은 1911년 4월부터 1921년 3월까지 경성중학교 부설 임시 소학교원(小學敎員) 양성소로 사용되다가 1928년 조계사로 팔려 이건되었다. 편전인 흥정당은 1915년 4월부터 1925년 3월까지 임시 소학교원 양성소 부속 단급(單級) 소학교 교실로 사용되다가 1928년 3월 광운사에 팔려 이건되었다. 정문인 흥화문도 1915년 8월 도로를 수리한다는 미명 아래 남쪽으로 옮겨졌다가 1932년에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인 박문사(博文寺)로 옮겨져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황학정(黃鶴亭)은 1923년 일반인에게 매각되어 사직단 동쪽으로 이건되었는데, 오늘날까지 활 쏘는 장소의 휴식공간으로 그 자리에 있다.

일제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를 저지하기 위하여 경희궁 터 북쪽, 즉 원래 왕과 왕비의 침전이 있던 자리 바로 뒤쪽에 거대한 방공호(防空壕)를 건설하고 이를 위장하려고 뒷산을 허물어 방공호를 덮었다. 이로 인하여 궁터는 회복할 수 없는 파괴를 당하고 말았으며, 오늘날까지 방공호는 철거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흉물로 남아 있다. 한국전쟁 기간에 경희궁은 미군이 진주하여 병영으로 쓰는 바람에 한 번 더 크게 파괴되었으며, 1980년대 후반 이후 궁역 서편 정문 가까이에 서울역사박물관을 지어 다시 한 번 궁역을 훼손하였지만, 정전 일곽이나마 복원되었다.

형태

「서궐도안」을 토대로 경덕궁의 배치 형식을 보면 첫째, 궁궐은 서쪽과 북쪽이 높고 남쪽과 동쪽이 낮은 지형에 조성되었는데, 건물의 좌향은 남향이었다. 둘째, 기슭 중간 지점에 정전과 편전 일곽을 넓고 반듯하게 앉혔다. 셋째, 정전의 서쪽 산기슭 가까이에 진전과 별당을, 멀리에 봉안각 등을 배치하였다. 넷째, 정전의 동쪽 지세가 낮은 곳에 편전과 침전을 앞뒤로 배치하고 그 동쪽으로 동궁을 넓게 배치하였다. 다섯째, 침전 뒤 북쪽은 지세가 훨씬 높은데 여기에 대비전(大妃殿)을 비롯하여 12채의 별당과 정자를 배치하여 금원(禁苑)을 조성하였다. 여섯째, 대문을 정전 남쪽에 두지 않고 궁역 맨 동쪽에 세움으로써 동쪽에서 서쪽으로 출입하게 하였다. 이는 창덕궁에서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이 서쪽에 치우쳐 있어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진입하도록 한 것과 대비된다.

관련사건 및 일화

광해군은 인왕산의 지맥에 자리 잡은 새문동 일대,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定遠君)의 집터에 왕기(王氣)가 서려 있다는 설을 내세워 그곳에 있던 조관(朝官)·종실(宗室)·사대부·서인(庶人) 등의 집을 모두 매수하여 새로운 궁궐을 지었다. 이 궁궐은 처음에 서별궁(西別宮)으로 불리다가 경덕궁으로 명명되었는데, 1760년(영조 36)에는 경희궁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영조는 경덕궁의 궐호(闕號)가 장릉(章陵)의 시호와 음이 같다는 이유로 경희궁(慶熙宮)으로 고치도록 했다

경덕궁 창건 두 해 전에 정원군의 3남 능창군(綾昌君)은 광해군에 의하여 역적으로 몰려 처형되었으며, 훗날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는 정원군의 장남이다. 광해군은 9년 동안 장기간의 토목 공사를 강행하였다. 1615년의 창경궁 중건을 시작으로 1617년부터 1620년 사이에 경덕궁 창건, 1616년(광해군 8)부터 1623년 사이에 인경궁을 창건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어느 궁궐에도 이어(移御)하지 못한 채 왕위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경덕궁수리소의궤(慶德宮修理所儀軌)』
  • 『궁궐지(宮闕志)』
  • 『서궐영건도감의궤(西闕營建都監儀軌)』
  • 『한경지략(漢京識略)』
  • 『홍재전서(弘齋全書)』「서궐도안(西闕圖案)」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편, 『서울육백년사: 문화사적편』, 서울특별시, 1987.
  • 윤정, 「영조의 경희궁 개호와 이어의 정치사적 의미: 사도세자 사사와의 상관성에 대한 분석」, 『서울학연구』제34호, 2009.
  • 은정태, 「고종시대의 경희궁: 훼철과 활용을 중심으로」, 『서울학연구』제34호, 2009.
  • 이강근, 「정조의 경희궁 운영과 건축」, 『서울학연구』제34호, 2009.
  • 한성국, 「인경궁고」, 『향토서울』21, 1964.
  • 홍석주, 「광해군대의 경덕궁(경희궁) 창건」, 『서울학연구』제34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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