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병(京騎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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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조의 재원 마련을 위해 주로 군포를 납부하던 군병.

개설

국초 경기병(京騎兵)은 호액(戶額)이 1,000명이고 보인(保人)은 3,000명에 달하였다. 경기병으로 입역(立役)하는 사람들은 호(戶)당 1명씩 차출되었으며, 이들은 한성에 거주하였다. 반면 이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해 주는 보인은 지방에 소재하였다. 호와 보를 물론하고 이들에게서는 모두 베 2필을 거두었다.

담당 직무

경기병은 18세기 초까지도 입역하는 경우가 있었으나 실제로는 모두 포를 거두는 자로 존재하였다. 경기병으로부터 징수한 포는 한성 각처 역군(役軍)의 고가(雇價) 등 병조(兵曹)의 재정으로 사용되었다.

변천

18세기 초까지는 형식적으로나마 경기병의 입역제도가 존재하였다. 1731년(영조 7)에 병조판서김재로(金在魯)가 “본조(本曹)의 도안(都案)에 이른바 경기병이란 자들은 외방에서 보포(保布)를 받아 경제적으로 지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역(役)이 천하고 또 번거롭기 때문에 사람들이 싫어하고 회피하여 혹 다른 역에 투속(投屬)하거나 도망쳐 버렸고, 남은 자들은 또 한성부 내 아전[部吏]의 사적인 용도로 편입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고(故) 판서민진후(閔鎭厚)가 일찍이 연석에서 아뢰기를, ‘500명을 정원으로 해서 5부(五部)에 분배해 즉시 대신 충당하게 해야 한다.’라고 하였으나, 그 후에도 구태의연하여 다 충당하지 못했습니다.”라고 지적하였다.

계속해서 그는 입역하는 자가 없고 포를 바치는 자도 별로 없어 약간의 보포로 사람을 고용할 뿐이니, 다시는 경기병을 입역시키지 말고 매 명마다 단지 포 1필씩을 거두어 사람을 고용할 밑천에 보태자고 건의하였다(『영조실록』 7년 6월 10일). 이로 볼 때, 18세기 초기까지는 형식적으로나마 경기병 입역의 제도가 존재했던 것 같다. 경기병의 입역을 없애자는 김재로의 건의는 숙종의 전교로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 내에 수록되었다.

1738년(영조 14)에는 경기병을 폐지하고 그 보인 1,500명을 별기병(別騎兵)으로 조직하여 포를 바치도록 하였다. 1739년(영조 15)에도 한성 5부의 부로(父老)들로부터 경기병의 폐단이 제기되었다. 17세기 이후 각 군문(軍門)이 계속 설치되어 양정(良丁)을 채울 수 없는데, 양정을 충정(充定)하도록 독촉하여 도민(都民)이 소요하는 폐단이 있다는 것이다(『영조실록』 15년 9월 6일). 양역(良役)의 역종별 정족수를 하향 고정화하는 정액(定額) 작업이 진행되는 환경에서, 그 영향으로 1739년 9월에 경기병은 완전히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만기요람(萬機要覽)』
  •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