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암사적(黔巖事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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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1년 8월 영조가 왕세제(王世弟)에 오르기 전에 검암(黔巖) 역참에 묵으면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보였던 사적.

개설

검암사적이란 1721년(경종 1) 8월 15일 숙종의 탄신일에 영조가 명릉(明陵)을 배알하고 돌아오는 길에 검암 역참에서 쉴 때 있었던 일이다. 어떤 이가 남의 소를 훔쳐 덕수천(德水川)을 지나가자, 영조는 검암참장(黔巖站將)인 이성신(李聖臣)에게 이를 해결하도록 했다. 검암참장은 훔친 소를 주인에게 돌려주고 소도둑은 관에 고발하지 않았다. 새벽에 영조가 궁으로 돌아오니 ‘왕세제(王世弟)’로 세워져 있었다. 이후 1756년(영조 31)에 명릉을 배알하고 검암에 들른 영조는 이성신의 아들인 이인량(李寅亮)을 찾아서 궁시(弓矢)를 주고 아버지 직을 세습하도록 했다.

위치 및 용도

검암은 조선시대에 고양군 검암리에서 의주로 향하는 길목에 있었다. 현재 검암은 행정구획상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내동 소속이다. 이곳은 역참이 배속되어 숙종과 인현왕후, 인원왕후의 능인 명릉에 오고갈 때에 들러 쉬는 곳으로 사용하였다.

변천 및 현황

1781년(정조 5)에 정조는 경기관찰사에게 퇴락한 검암 역참을 새롭게 단장하고 비를 세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도록 명했다. 정조는 검암 역참에서 있었던 영조의 사적을 기록하고 자신의 회포를 적은 「검암기적비명(黔巖紀蹟碑銘)」과 서문을 어필로 써서 1781년 8월 15일에 사적비를 세웠다.(『정조실록』 5년 8월 15일) 정조는 영조가 만백성을 사랑으로 다스렸던 정사(政事)가 이미 검암 역참에서 알 수 있고, 그 달에 왕세제가 되었으며 이제 자신이 그 대업을 이었음을 비문에 밝혔다. 영조가 명릉에 전배(展拜)하러 행행(行幸)할 때 손자인 정조가 따라간 적이 많았는데, 출궁(出宮)을 밤에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검암의 주정소(晝停所)에 천막을 쳐서 임시 거처인 막차(幕次)를 마련한 뒤 함께 잤다. 그때 영조는 뒹굴며 자는 손자에게 이불을 덮어 주느라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정조는 밤에 이곳에 거둥할 때마다 영조를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했던 것이다. 정조는 풍양(豊壤)의 예(例)에 의해 경기도관찰사에게 검암의 비각(碑閣)을 봉심하게 하도록 법식으로 삼았다. 1978년에 진관내동 428번지에 있는 검암기적비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었다.

형태

관련사건 및 일화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