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암발참(黔巖撥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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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양과 의주를 연결하는 파발로인 서발 노선 중 경기도 양주에 설치한 파발참.

개설

검암참(黔巖站)은 조선시대 3대 파발로인 서발(西撥)·북발(北撥)·남발(南撥) 가운데 서발 노선에 포함된 발참(發站)이다. 경기도 양주에 위치하여 한양에서 의주 방면으로 향하는 첫 번째 발참에 해당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검암참은 『세종실록』「지리지」와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보이지 않고,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숙종 연간 기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정유재란 때 파발제를 도입한 이후 조선후기에 신설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직 및 역할

조선후기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경기도 양주 역원조에는, 당시 검암참에 발장(撥長) 1명, 발군(撥軍) 5명과 파발마 5필이 배속되어 있다. 『대동지지(大東地志)』「정리고(程里考)」 발참조에는 서발의 서북로에 포함되었다. 서발은 한양의 돈의문 밖에 위치한 기영참(畿營站)에서 출발하여 양주의 검암참을 지나 의주 관문참에 도착하는 노선이었다.

검암참은 국왕이 서오릉, 서삼릉으로 능행(陵幸)할 때, 출궁한 뒤 첫 번째로 쉬는 주정소(晝停所)로 자주 이용되었다. 또한 검암참이 위치했던 곳에는 검암기적비(黔巖紀蹟碑)가 남아있는데, 정조가 영조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1781년(정조 5) 정조가 8월에 서오릉에 있는 숙종의 명릉(明陵)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영조가 검암참에서 겪었던 옛일을 회상하면서 그 공적을 기리기 위해 친히 비문을 짓고 쓴 뒤 비를 세웠다. 영조의 공적이란, 영조가 국왕이 되기 전에 검암참에서 묵었던 일이 있었는데, 당시 검암참의 참장(站將)이성신(李聖臣)이 소를 훔치던 자를 고발하려고 하자 영조는 흉년에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일이라며 당사자를 용서하게 하고 소는 주인에게 돌려주라고 한 일화를 말한다(『정조실록』 5년 8월 15일). 이 비가 이른바 검암기적비이다. 『정조실록』에는 이 비석을 "발참의 옛터에 세웠다"혹은 "파발 관사 앞에 세웠다"고 하였다. 현재 검암기적비에서 50m 거리에 비석을 기리기 위해 세운 하마비(下馬碑)가 있는 점으로 보아, 검암참은 현재의 금암문화공원 일대에 위치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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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여지도서(輿地圖書)』
  • 『만기요람(萬機要覽)』
  • 『대동지지(大東地志)』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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