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주삼위(建州三衛)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명나라에서 남만주에 거주하는 여진족의 통치를 위해 설치한 위소(衛所).

개설

건주삼위는 명이 남만주에 거주하는 여진족을 회유하고 복속시키기 위해 설치한 건주위(建州衛)·건주좌위(建州左衛)·건주우위(建州右衛)의 세 위소를 통칭하는 말이다. 건주위는 1403년(명 성조 영락 1, 조선 태종 3) 11월에 올량합(兀良哈)의 추장 어허출(於虛出, [阿哈出])이 명나라에 내조(內朝)하면서 설치되었다. 건주좌위는 1416년 알타리(斡朶里)의 추장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를 건주위에서 분리시키면서 개설되었다. 건주우위는 1442년(명 영종 정통 7, 조선 세종 24)에 건주좌위에서 범찰(凡察)과 동창(童倉, [童山]) 사이에서 건주좌위의 관인을 뜻하는 위인(衛印)을 차지하기 위한 분쟁이 발생하자 건주좌위를 좌위와 우위로 분리하면서 설치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건주삼위는 명나라가 여진 지역에 설치한 위소로, 건주위·건주좌위·건주우위의 세 위소를 말한다. 명나라의 성조(成祖)영락제(永樂帝)는 내부적인 안정책을 모색하면서 대외 진출을 통해 북변의 위협을 막고자 하였다. 우선 영락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몽골을 정벌하였다. 이와 함께 여진 세력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키고 조선과 몽골을 견제하는 방법으로써 요동의 여진 지역에 위소를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명의 여진 지역 위소 설치는 두 가지 방향에서 전개되었는데, 하나는 압록강·두만강 유역의 여진족을, 다른 하나는 흑룡강 유역의 여진족을 회유하고 복속시키기 위해 설치하였다.

이러한 정책에 따라 1403년 11월 올량합 어허출이 명나라에 내조하자 명 성조는 건주위군민지휘사사(建州衛軍民指揮使司)를 설치하여 그를 지휘사(指揮使)로 삼았다. 이로써 건주위가 설치되었고, 이것이 명나라의 여진 지역 위소 설치의 시발점이 되었다.

한편 명 성조는 알타리 동맹가첩목아를 입조시켜 두만강 유역의 여진인들을 회유하고 복속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동맹가첩목아가 다스리던 지역을 조선의 울타리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 외교적 마찰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마침내 1405년 동맹가첩목아가 명나라에 내조하였고, 명으로부터 건주위도지휘사(建州衛都指揮使)에 제수되었다(『태종실록』6년 3월 6일). 1410년 조선이 여진 정벌을 단행하자, 동맹가첩목아는 위협을 느끼고 봉주(鳳州)로 이동하여 아합출과 회합하였다(『태종실록』11년 4월 26일). 명나라는 1416년 이들을 건주위에서 분리시켜 건주좌위를 개설하였다.

1423년 건주좌위를 이끌던 동맹가첩목아는 회령 지방으로 다시 이동한 뒤, 1433년(명 선종 선덕 8, 조선 세종 15) 올적합(兀狄哈)의 침입으로 죽임을 당하였다(『세종실록』16년 1월 28일). 이로써 건주좌위는 동맹가첩목아의 이복동생 범찰과 동맹가첩목아의 아들 동창이 이끌게 되었다. 1440년에 범찰과 동창은 압록강 지류인 파저강(婆猪江) 유역으로 이동하였던 이만주(李滿住)의 건주위로 이동하여 이만주와 회합하였다(『세종실록』22년 6월 26일). 그러나 범찰과 동창 사이에 건주좌위의 관인, 즉 구인(舊印)과 신인(新印)을 둘러싼 위인(衛印) 쟁탈 문제가 일어나면서 분쟁이 발생하였다. 이것은 건주좌위의 지도권을 둘러싼 범찰과 동창의 세력 갈등이었다. 명나라에서는 1442년 건주좌위를 분리하여 건주우위를 신설하고 동창으로 하여금 건주좌위를, 범찰로 하여금 건주우위를 관장하게 하였다. 이로써 건주위·건주좌위·건주우위의 건주삼위가 정착되게 되었다.

조직 및 역할

최초의 여진 지역 위소가 되는 건주위는 각지에 산재해 있는 여진인을 회유하고 복속시키려는 명나라의 전초 기지 역할을 하였다. 건주위가 설치되자 어허출은 명나라의 요동 경략에 협력함과 동시에 여진 내부에서 세력 확대를 기도하였다. 특히 명나라에서는 건주위를 통해 지금의 남만주 일대를 경략하려고 하였으며, 이에 조선과 명이 남만주의 경략을 둘러싸고 일시 대립하기도 하였다. 한편 여진 각 부족이 명나라에 속속 귀부함에 따라 명나라에서는 위소를 차례로 설치해 나갔다. 그 결과 1403년부터 1409년까지 모두 115개 위소(衛所), 1447년까지는 184개의 위와 20개의 소가 설치되었다.

변천

건주위는 이만주가 압록강 지류인 파저강 유역으로 이동한 이래, 조선의 변경을 자주 침입하면서 조선의 정벌을 받게 되었다. 세종대에는 1433년(세종 15)과 1437년(세종 19)의 두 차례에 걸쳐 건주위를 정벌하였으며, 건주위의 침입에 대비하여 4군을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건주좌위의 동맹가첩목아가 회령에서 올적합에 의해 피살되자 이를 계기로 두만강 유역에 5진을 설치하였고, 부령을 포함한 6진을 완성하였다.

4군 6진 설치 이후에도 건주삼위는 조선에 내조하여 경제적 이익을 얻기도 하고, 변경을 침입하기도 하였다. 조선은 1467년(세조 13)과 1479년(성종 10)에 다시 건주삼위에 대한 정벌을 실시하였는데, 이 두 차례의 정벌은 건주삼위의 조선 침입뿐만 아니라 명의 협공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연산군대에는 위원(渭原) 지역이 여진인에게 침입을 받은 것을 계기로, 귀화인 동청례(童淸禮)를 건주삼위에 파견하였다(『연산군일기』 2년 7월 23일). 조선은 동청례를 파견하여 건주삼위에 거주하는 조선인 포로들을 쇄환하고 여진인들의 침입을 금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여진인들의 조선 변경 침입이 계속되었고, 조선은 여진인들의 침입에 대해 정벌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조선과 건주삼위가 항상 적대적인 관계였던 것은 아니었다. 1455년(세조 1)에 4군이 폐지된 뒤 조선과 건주삼위 및 압록강 유역의 여진인들이 주로 교섭하던 장소는 조선의 만포(滿浦)였으며, 만포를 중심으로 한 교섭은 누르하치[努爾哈赤]가 건주삼위를 통합한 뒤에도 계속되었다.

한편 건주위는 명나라의 위소체제에 편입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명나라에 완전히 복속된 것도, 종속적 관계를 맺은 것도 아니었다. 명나라에서는 건주위를 완전하게 다스리지 못하고 부족장에게 자치를 맡겼으며, 위소 관직은 세습되었다. 건주위는 명나라의 요동정책에 부응하면서 협력관계를 유지하였고, 명에 대한 조공과 마시(馬市) 무역을 통해 사회·경제적 성장을 이루었다. 1449년 토목보(土木堡)의 변 이후, 생필품 등이 부족해진 건주삼위를 비롯한 여진인은 명나라의 방어가 소홀해지자 크고 작은 약탈과 침입을 하였으며, 조선의 사행로(使行路)인 요동팔참(遼東八站)을 점거하기도 하였다. 명나라에서는 건주여진의 침입에 대비해 요동변장(遼東邊墻)을 쌓는 한편 건주인에게 군사적 응징을 가하였으며, 조선에 협공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건주삼위는 건주여진으로 불리기도 하였는데, 누르하치가 태어났을 때는 5개의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다. 누르하치는 명의 후원을 받으면서 성장하여 1589년(명 신종 만력 17, 조선 선조 22) 건주여진 5부족을 통일하였고, 1599년에는 해서여진을 멸망시켰으며, 1616년(명 신종 44, 청 태조 천명 1, 조선 광해군 8)에는 금(金) 제국을 건국하였다.

참고문헌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22 : 조선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국사편찬위원회, 1995.
  • 남의현, 『명대 요동 지배 정책 연구』, 강원대학교출판부, 2007.
  • 한성주, 『조선 전기 수직여진인 연구』, 경인문화사, 2011.
  • 강성문, 「조선시대 여진 정벌에 관한 연구」, 『군사』18, 1989.
  • 한성주, 「조선 연산군대 동청례의 건주삼위 파견에 대하여」, 『만주연구』14,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