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인사(建仁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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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고려대장경을 요청했던 일본 경도의 임제종 사찰.

개설

일본 경도(京都)에 소재한 임제종 건인사파의 대본산인 건인사(建仁寺)는 1201년에 명암영서(明庵榮西)가 막부(幕府)의 지원을 받아 창건한 사찰이다. 그 후 여러 차례 화재로 피해를 입어 많은 전각들이 소실되었다. 1457년 승려 전밀(全密)과 영숭(永嵩) 등을 조선에 파견하여 재건 비용을 요청하였다. 조선에서는 대장경 1부와 동전 10,000관과 인삼 500근을 도와주었다.

창건과 역사

건인사는 임제종(臨濟宗) 건인사파(建仁寺派)의 대본산(大本山) 사원(寺院)이다. 이 절은 송나라에 유학하여 임제종을 일본에 전래한 명암영서가 1202년에 겸창막부(鎌倉幕府) 제2대 장군인 원뢰가(源賴家)의 지원을 받고 송나라 백장산(百丈山)의 사찰을 모방하여 조성한 사찰이다. 초기에는 진언원(真言院)과 지관원(止観院)을 세우고 진언(眞言)·천태(天台)·선(禪)의 겸학을 표방했지만 제10대 주지 원이변원(圓爾弁圓)과 제11대 주지 난계도륭(蘭溪道隆) 때에 선종 사찰이 되었다.

그 후 건인사는 경도 오산(五山) 중 제3위에 위치하여 막부의 통제와 보호를 받았다. 1340년, 1355년, 1397년, 1435년에 화재가 나서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1435년의 화재 피해가 심각하였다. 1457년에 막부 제8대 장군이었던 족리의정(足利義政)이 승려 전밀과 영숭 등을 조선에 파견하여 건인사 재건 비용으로 동전 5만민(萬緡)을 요청하였는데(『세조실록』 3년 3월 15일), 조선에서는 대장경 1부와 동전 10,000관과 인삼 500근을 도와주었다(『세조실록』 3년 5월 26일). 조선의 도움으로 재건하였으나, 1469년에 응인(應仁)의 난이 일어나 다시 피해를 입었고, 1552년의 화재로 건물들이 소실되었다.

일반 서민들의 시주를 받아 명맥을 유지하던 건인사의 재건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1599년에 안예(安藝)의 안국사(安國寺)로부터 방장(方丈)을 건인사로 옮겨 지으면서부터이다. 이후 탑(塔)과 건물이 재건되었다.

석학제와 정암윤번제

강호막부(江戶幕府)는 실정막부(室町幕府)의 정책을 이어받으면서 석학제(碩學制)와 비슷한 정암윤번제(酊庵輪番制)를 만들었다. 석학제는 경도 오산(五山)의 승려 중 우수한 학문승에게 석학료(碩學料)를 지급하는 제도인데, 건인사는 최초로 고간자계(古澗慈稽), 삼강소익(三江紹益), 이봉동예(利峰東銳) 3명이 추천되었다. 정암윤번제는 대마도의 이정암(以酊庵)에서 조선과의 외교를 맡은 조선수문직(朝鮮修文職)을 석학이 교대로 맡는 제도이다. 1635년부터 1866년까지 건인사에서는 18명의 석학이 선발되었다.

명치시대

명치(明治)시대에 들어와 정부의 종교 정책에 따라 임제종 건인사파로 분파되었고, 건인사는 대본산이 되었다. 또한, 폐불훼석(廢佛毁釋)과 신불분리령(神佛分離令) 등으로 인해 탑두(塔頭)가 통폐합되었고, 남은 토지를 정부에 상납하여 경내는 반분 가까이 축소되었다.

참고문헌

  • 한문종, 「조선전기 일본의 대장경구청과 한일간의 문화교류」, 『한일관계사연구』 17, 2002.
  • 京都國立博物館 編, 『建仁寺: 京都最古の禪寺』, 京都: 讀賣新聞大阪本社, 2002.
  • 相賀徹夫 著, 『探訪日本の古寺』 7: 京都二, 東京: 小學館,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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