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륭제(乾隆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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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제6대 황제.

개설

이름은 애신각라 홍력(愛新覺羅 弘歷)이며 묘호는 고종, 연호는 건륭(乾隆)이었다. 1735년 옹정제가 제정한 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에 의하여 황제로 즉위하였으며 다음 해인 1736년 건륭으로 연호를 고쳤다. 그의 즉위 소식은 청나라 사신에 의하여 조선에 전해졌다[『영조실록』 11년 11월 12일]. 재위한 지 60년이 되는 해에 조부인 강희제(康熙帝)의 재위 기간인 61년을 넘는 것을 꺼려 다음 해에 열다섯 번째 황자(皇子)인 옹염(顒琰)에게 선위한다는 칙서를 발표하고 다음 해 정월 선위를 거행해 태상황제(太上皇帝)가 되었다. 강희제에 이어 정치와 경제, 문화적으로 강건성세(康建盛世)라 불리는 청나라의 최전성기를 이룩하였다.

활동 사항

1736년 박학홍사과(博學鴻詞科)를 두었고, 1773년 사고전서관(四庫全書館)을 설치하였다. 문자옥(文字獄)을 크게 일으킨 것이 수십 건에 이르렀고,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찬하면서 편찬의 편의를 도모한다는 이유로 많은 서적을 훼손하거나 수정하였다. 서북 방면에 대해서는 준갈이부(準噶爾部)를 평정하고, 크고 작은 화탁목(和卓木) 세력을 멸망시키는 등 강희제(康熙帝)와 옹정제 이래의 숙원 과제를 해결하였다. 재위할 때 이전 황제를 본떠 남쪽으로 순행을 6차례 하였고, 여러 번 지방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많은 비용을 소모하였다. 만년에 화신(和珅)을 등용하면서 정치는 부패해 갔고, 몽골·네팔·대만·월남 등을 상대로 10번의 원정을 통하여 모두 승리를 거둔 십전무공(十全武功)이라는 허울에 도취되어 스스로 십전노인(十全老人)이라 불렀다.

시폐(時弊)를 따지는 관리에 대해서는 엄한 질책을 내렸다. 또한 각 성의 재정 적자에 대해서도 엄중하게 따져 신중하지 못하고 부패한 경우 감독을 철저하게 하였다. 1793년 영국의 특사 매카트니를 접견하고 영국이 제시한 불평등한 요구를 거절하였지만, 그들을 경계해야 한다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였다. 1795년 할아버지 강희제의 재위 기간인 61년을 넘는 것을 꺼려 다음 해 열다섯 번째 황자 옹염에게 선위한다는 칙서를 발표하였다. 다음 해 정월에 선위 대전(大典)을 거행하고 태상황제(太上皇帝)가 되었는데, 사실상 실권은 그대로 쥐고 있었다[『정조실록』 19년 11월 28일].

태상황제로 있던 3년을 합칠 경우 중국 역대 황제 중 재위 기간이 가장 길었다. 문화적으로는 그의 개인적 자질까지 가미되어 청의 발전이 절정에 달하였고, 예수교 전도사들을 통하여 서양의 학문과 기술이 전래되는 한편, 중국이 유럽에 소개되는 등 국제적 교류의 길이 열렸다. 고증학(考證學)의 번영을 배경으로 사고전서가 편집되고 『명사(明史)』가 완성되는 등 역사서를 편찬하는 수사사업(修史事業)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총애하던 화신의 전횡과 관리의 권력남용 등의 부패, 만주인과 무관들의 타락 등으로 백련교(白蓮敎)의 난이 표면화되는 등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청 제국은 차츰 쇠퇴기로 접어들게 되었다[『정조실록』 11년 2월 11일].

학문과 사상

고대 전적의 정리를 대단히 중시하여 사고전서를 편찬하였으며 『흠정삼례소(欽定三禮疏)』·『주관의소(周官義疏)』·『의례의소(儀禮義疏)』·『예기의소(禮記義疏)』·『흠정주역술의(欽定周易述義)』·『흠정시의절중(欽定詩義折中)』·『흠정춘추직해(欽定春秋直解)』·『흠정번역사서오경(欽定飜譯四書五經)』 등을 편찬하였다.

묘소

순치제(順治帝)의 효릉(孝陵)을 중심으로 서쪽 승수욕(勝水峪)이 건륭제의 유릉(裕陵)이었다.

참고문헌

  • 마크 C. 엘리엇 저, 양휘웅 역, 『건륭제』, 천지인, 2011.
  • 임종욱, 『중국역대인명사전』, 이회문화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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