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부행궁(江華府行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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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부내 관아 인근에 조선후기부터 말기까지 설치하였다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파괴한 행궁.

개설

강화부행궁(江華府行宮)은 왕이 유사시에 외적으로부터 피난할 수 있는 보장처로 만들어진 행궁이었다. 남한산성행궁이나 북한산성행궁과 같이 왕이 중심이 된 행궁으로 평소에 지방 관료는 물론 누구나 함부로 사용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따라서 임시로 사용한 행궁이기는 했지만 궁궐과 유사한 지위를 가진 궁으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국왕이 궁궐에서 벗어나 외부의 숙소에서 임시로 숙박 혹은 경숙(經宿)하는 곳을 행궁이라고 하였다. 왕이 도성 내외를 막론하고 숙소로 한번 결정하면 행궁의 명칭을 부여하였다. 왕이 어떤 곳에 행(幸)한다는 의미 자체가 그곳을 행궁으로 만드는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물론 왕이 도성 내에서는 보위에 오르기 전의 잠저 혹은 공주나 부마 등의 왕족 처소에 행행하였으므로 행궁으로 삼지는 않았다. 대부분은 도성을 벗어나 원거리를 행행하는 능행, 원행, 강무, 온행 시에 임시로 숙소를 만들거나 관사를 이용하면서 행궁이라고 호칭하였다.

그런데 왕은 자신이 사용하지 않는 행궁을 고위 관원이나 지역 관장도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따라서 행궁은 왕의 임시 처소로서 항구적인 궁의 역할은 하지 않았다. 실제로 왕이 행행한 지역의 행정 명칭을 붙여 지칭하는 것이 많았다. 다만 조선후기에는 외침을 당해 왕이 임시로 피신하면서 이용한 곳이나 미리 왕실의 보장처에 행궁을 마련하면서 이름을 붙인 경우도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 행궁은 시대에 따라 설립 배경에 차이가 있으며, 그 용도와 규모도 구별되었다.

위치 및 용도

강화부행궁은 왕과 왕실이 외침을 당했을 때 그 예봉을 피하기 위해 도성을 떠나 임시로 거처하려고 대비해 둔 보장처에 설립한 행궁이다. 강화부행궁은 강화도 섬 내부에 있었으므로 능행과 원행 같은 왕실과 국가의 의례적인 일로 사용하는 것과는 관련 없이 군사적인 대비용으로 만든 것이다.

강화부를 보장처로 이용하려는 시도는 광해군대에 보인다. 1619년(광해군 11)에 강화도는 서울과 100리 거리이며 섬이라 방어에 유리한 금성탕지(金城湯池)로서 판옥선(板屋船) 30척에 병선 몇 척만 거느리고 요해처를 지킨다면 보장처로 충분하다고 과신하였다(『광해군일기』 11년 6월 29일).

실제로 1625년(인조 2)에 호란을 대비하는 차원에서 인조가 파천한 곳이기도 하다. 이후 강화부행궁에는 외규장각(外奎章閣)이 설치되었으며 왕실의 전적을 보관하기도 했지만, 왕실 진전(眞殿)이나 보각(譜閣)의 기능도 겸하였다. 반면 외침을 앞두고 왕이 보장처로 도망가는 것은 여론이 좋지 않았다. 실제로 인조가 병자호란 때 강화부행궁으로 가려고 할 때 행궁을 불사르고 결전에 임하자는 의견이 있을 정도였다(『인조실록』 14년 8월 20일).

숙종대인 1695년(숙종 21)에 어진을 보관하는 장녕전(長寧殿)을 세웠으며, 영조대인 1745년(영조 21)에는 영조의 어진을 만녕전(萬寧殿)에 봉안하였다(『영조실록』 21년 1월 9일). 정조가 즉위한 1776년(정조 즉위)에는 영조 어진을 만녕전에서 장녕전으로 옮겼다(『정조실록』 즉위년 5월 1일).

변천 및 현황

강화부행궁은 강화도라는 섬을 배경으로 보장처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병자호란과 같이 바다로부터의 방어가 쉬운 곳은 아니었다. 강화도로 진입하는 주요 요해처를 방비하지 못하면 오히려 사방에서 침입을 받을 수 있었다. 이에 따라 1708년(숙종 34)에 인천에서 강화도로 연결되는 영종진(永宗鎭)에 방어사를 두어 강화도로 상륙하는 길목인 갑곶진(甲串津)과 통하지 못하게 하는 방안을 채택하였다. 또한 월미도에 행궁을 설치하여 강화행궁으로 가기 전에 머무는 장소로 삼았다(『숙종실록』 34년 4월 21일).

그런데 병인양요가 발생하기 1년 전인 1865년(고종 2)에는 강화도의 각 진보(鎭堡)의 돈대(墩臺)·군기고(軍器庫)와 진장(鎭將)의 공관 대부분이 퇴락하였고, 성첩(城堞)·행궁(行宮)·관사(官舍)들도 수선해야 할 곳이 많았다(『고종실록』 2년 윤5월 2일). 따라서 조선후기로 갈수록 행궁을 수선하지 못하고 방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1866년(고종 3) 10월 16일에 프랑스군이 강화도에 상륙하여 강화부를 점령한 병인양요가 발생하였다. 프랑스군은 강화부를 점령하고 행궁을 주둔지로 이용하였다. 11월에 프랑스군은 행궁의 전적과 재화를 약탈한 뒤 후퇴하면서 행궁의 장녕전, 만녕전, 봉선전(奉先殿), 외규장각 등을 모두 방화하고 강화부의 관아들도 모두 불태웠다.

형태

1695년(숙종 21)에 장녕전, 1713년(숙종 39)에 만녕전, 1722년(경종 2)에 신장녕전, 1782년(정조 6)에 외규장각, 1858년(철종 9)에 봉선전 등을 건립하였다. 봉선전은 1622년(광해군 14)에 건립하였으나, 1637년(인조 15)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되어 소실된 후 철종대에 재건한 것이다. 그런데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모두 전소시켰다.

관련사건 및 일화

강화부에 행궁을 설치한 것은 고려 때부터 왕궁을 건설한 역사적 배경도 있지만, 강화에서 뱃길을 이용하면 순풍에 충청도 안흥진(安興鎭)에 이르고, 안흥에서 다시 순풍에 돛을 달면 전라도 격포(格浦)에 이르는 지리적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원경하가 격포에 행궁을 창건하였고, 서명구(徐命九)가 격포 행궁을 중수한 일이 있었다(『영조실록』 30년 5월 4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강화부궁전고(江華府宮殿考)』
  • 『만기요람(萬機要覽)』
  • 나신균, 「인조~숙종대 행궁의 배치와 공간이용에 관한 연구」, 명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 柳承宙, 「南漢山城의 行宮·客館·寺刹建立考」, 『韓國史硏究』120, 2003.
  • 이왕무, 「조선시대 국왕의 溫幸 연구」, 『국사관논총』108, 2006.
  •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능행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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