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무당(講武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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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이 강무(講武)하는 장소에 지었던 건물.

개설

국왕이 군사들의 무기 훈련과 기마 연습을 사열하거나, 도성 외에서 사냥을 하며 무예를 익히는 것 등에 참여하는 것이 강무이며, 강무에서 지휘 및 진법의 강습이 이루어지는 건물이 강무당이다. 조선초기에는 개성부 문묘의 영역에 강무당이 들어 있어 군사 훈련과 강습은 물론, 장수들이 사명을 받아 나아갈 때 대장기인 둑(纛)에 제사하는 장소로도 쓰였다(『세종실록』 4년 11월 18일). 그러나 이후 폐지되었다. 태종 이후에는 사냥을 하며 군사 훈련하는 강무를 전국 각지에서 행하였고 이 장소를 강무장이라고도 하였다.

위치 및 용도

강무는 주로 조선전기에 많이 시행되었으며, 왜란과 호란을 거치며 사라졌다. 조선후기에는 정조대 강무당이 나타났다(『정조실록』 14년 5월 7일). 정조 때, 수원화성(華城)을 건설하면서 행궁의 서북쪽에 무고(武庫)·수성고(修城庫) 등과 함께 강무당을 배치해 두었고 그 앞에는 훈련 마당을 두었다. 정조는 군사들의 대오를 점검하거나 재주를 시험할 때 이 강무당에 앉아서 사열하고 훈련하였다. 당시 강무당은 별무사(別武士)와 행궁의 대문을 지키는 군사들의 임시 숙소로 쓰이기도 하였다.

변천 및 현황

개경은 이전 왕조인 고려의 도읍이자 조선왕조 초창의 거점으로, 새로운 도읍을 구성하는 데 전거가 되었다. 조선초에는 개성부 문묘의 영역에 군사 훈련과 관련한 태청관(太淸觀)과 그 남쪽에 강무당을 두었으나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국조보감(國朝寶鑑)』 1458년(세조 4) 1월의 기사에 따르면, 태종이 머물던 풍양궁(豐壤宮)에 강무할 관사를 지으라고 명하는 기록이 있다. 이후 강무당은 정조대 등장한다. 정조 때 화성 행궁과 함께 강무당이 건설되기도 하였다. 이때의 강무당은 행궁의 낙남헌(落南軒)에서 210여 보쯤 북쪽에 배치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

형태

정조대 강무당을 본다면, 화성 행궁의 전각인 낙남헌 앞마당과 강무당 앞 군사 훈련장은 서로 통하는 위치에 놓여 있었다. 강무당 상량문에 “단이 있고 광장이 있는 높은 집을 차지하여 총을 쏘고 대포를 놓고 말 타고 달리는 그 용모가 흐뭇하다.” 하는 내용에서 군사 훈련하는 장소로 위용 있는 집의 당당함을 느낄 수 있다. 이때의 강무당은 서쪽 산기슭에 자리해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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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0년(정조 14)에는 대청이 있는 14칸 집을 지었으나, 1794년(정조 18)에는 26칸으로 증축하였다. 이 건물을 중심으로 뒤편에, 즉 건물 북쪽으로 7칸, 그로부터 서쪽으로 꺾어 5칸 다시 남쪽으로 꺾어 11칸, 다시 동쪽으로 꺾어 3칸의 행각을 증축하였으며 온돌·헛간·부엌·문간 등으로 구성되었다. 건물의 좌측인 북쪽에는 ‘무고(武庫)’, ‘수성고(修城庫)’ 등과 행각, 마당 등이 연이어진 군영 건물의 한 영역을 이루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현륭원(顯隆園) 국내(局內) 동쪽 언덕에도 강무당이 있었으나 정조 사후 그 자리에 정조의 능침을 조성하였다(『정조실록』 24년 7월 15일). 정조의 비 효의왕후(孝懿王后)가 승하한 후 건릉(健陵)의 지대가 낮고 강무당이 있었던 곳이므로 길지가 아니라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이에 다시 현륭원의 서쪽 언덕, 현재의 건릉 자리로 옮겨 효의왕후와 함께 합장한 산릉이 조성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계산기정(薊山紀程)』
  • 『국조보감(國朝寶鑑)』
  • 『목은시고(牧隱詩藁)』
  • 『삼봉집(三峯集)』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