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함몰(江都陷沒)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병자호란 당시 세자빈과 원손, 조정관원 등이 피난한 강화도가 청나라 군대에 점령당하고, 봉림대군 등이 청의 장수에게 항복한 사건.

개설

청나라가 중원의 명나라에 대한 공격을 앞두고 조선을 확실하게 제어할 목적으로 1636년(인조 15)에 조선을 전면적으로 침입함으로써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청군의 남하 속도가 워낙 빨라, 조선의 왕과 조정은 예정된 피난처였던 강화도로 미처 피난하지 못한 채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세자빈과 원손(元孫), 대군, 일부 조정원로, 한양 사대부가의 가족들 정도만 강화도로 피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방어태세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강화도는 이렇다 할 항전조차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청나라 군대에 점령당했다. 이 과정에서 장수들은 대개 도주했으며, 일부 관료와 사대부가의 가족들은 자결을 택했다. 또한 청나라 군사들의 살육과 약탈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봉림대군이 곧 항복을 결정하고 청의 진영에 투항하였는데, 이는 당시 남한산성에서 농성 중이던 왕이 항복을 결심하는 주요 동기가 되었다.

역사적 배경

강화도는 예로부터 수로(水路) 작전에 익숙하지 못한 북방민족의 침입으로부터 나라의 종묘와 사직을 지킬 수 있는 천혜의 피난처로서 기능을 해왔다. 고려왕조는 13세기에 몽골의 침입을 피해 도읍을 아예 강화도로 옮긴 바 있으며,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강화도의 방어 기능을 중시했다. 1627년(인조 5)에 후금이 침입해왔을 때에도 조선 조정은 강화도에 들어가 방어진을 구축한 상태에서 강화협상에 임했다. 이후에도 조정에서는 강화도 방어 계획과 유사시 피난 계획을 세웠으나, 정작 병자호란을 맞아서는 임기응변식의 대처와 군사력의 현격한 열세로 인해 강화도가 역사상 처음으로 북방민족에게 무력으로 함락되었다.

발단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이후 조선 조정에서는 가급적 후금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갖가지 사안을 놓고 양국 사이의 이해가 대립하면서 긴장이 고조되었다. 정묘화약(丁卯和約) 당시 약속한 조선과 명의 완전한 단절이 지켜지지 않은 점, 가도(椵島)에 주둔해 있는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 처리 문제, 요동 난민 처리 문제, 개시(開市) 문제, 세폐(歲幣) 문제 등이 줄을 이으면서 조선 조정에서는 척화(斥和) 목소리가 점차 커졌다. 이런 상황에서 청(淸) 태종(太宗)이 1635년(인조 14)에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조선에 대해 기존의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조정하라고 요구해 오자, 조선 조정에서는 척화파의 주장이 더욱 커졌다. 이에 청 태종은 1636년(인조 15) 11월에 최후통첩을 보냈고, 조선이 응답하지 않자 12월에 바로 대군을 동원해 압록강을 건너 침입했다.

경과

명나라를 중화의 정통으로 보는 인식이 절대적인 조선에서는 ‘오랑캐’인 청나라와 화친을 거부하는 척화론(斥和論)이 득세했지만, 그들의 침입에 대비하는 실질적인 국가의 방어태세는 매우 허술했다. 10만이 넘는 대군으로 1636년 12월 8일에 압록강을 건넌 청군(淸軍)은 빠른 속도로 남하해, 선봉대는 불과 엿새 만에 개성을 지나 한양 근교까지 도달해서 한양에서 강화도로 가는 길을 위협했다. 급보를 접한 왕과 조정 신료들이 미처 강화도로 피신해 들어갈 시간적 여유조차 없어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은 전쟁 발발 직후의 전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 잘 보여준다.

종묘의 신주를 받들고 왕보다 한나절 앞서 강화도 피난길에 오른 원임대신 김상용(金尙容)과 윤방(尹昉), 비빈(妃嬪), 대군(大君), 종실(宗室) 및 양반가의 식솔들은 피해를 당하면서도 끝내 강화도로 건너갈 수 있었다. 이때 강화유수장신(張紳)은 강화유수겸주사대장(江華留守兼舟師大將)에 임명되어 사실상 강화도 방어의 총책임자가 되었으며, 김경징(金慶徵)은 강도검찰사(江都檢察使)에 임명되어 왕실 구성원들의 안위를 책임졌다. 그러나 순식간에 벌어진 사태로 인해, 강화도의 병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최대로 잡아도 5천 명을 넘지 않았으며, 최소로 잡으면 1천 명 남짓이었다. 반면에 강화도 공격을 맡은 청나라 군대는 3만 명을 넘었으며, 홍이포(紅夷砲)를 보유하는 등 화력도 뛰어났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 강화해협의 물살로 인해 쉽게 도강을 하지 못하던 청군은 주변에서 끌어모은 작은 규모의 선박과 뗏목에 선발대를 나누어 태워 마침내 1637년(인조 16) 1월 21일 새벽에 도강을 시도했다. 강화도 갑곶의 건너편인 통진에서는 홍이포를 쏘아 갑곶 수비진을 혼란에 빠뜨리고, 그 틈을 타 상륙한 청군은 갑곶의 조선 수비대를 쉽게 제압하고 교두보를 확보했다. 갑곶나루를 청군에게 빼앗김으로써 조선군은 큰 혼란에 빠졌는데, 강화도 방어의 최고 책임자인 장신과 김경징은 모두 광성진으로 퇴각한 후에 바로 육지로 도주해 버렸다.

이후 청군은 일부 조선군의 저항을 손쉽게 제압하며 전진을 계속해 같은 날 점심 무렵에는 강화성(江華城)을 포위하고 항복을 권유했다. 조선군의 응답이 없자 청군은 하루 뒤인 22일 점심 무렵에 공격을 시작했다. 혼전 끝에 청군이 성안으로 들어오면서 전세는 순식간에 기울었다. 이때 원임대신 김상용을 비롯해 일부 관원들이 스스로 폭약을 터뜨려 자결했으며, 많은 장교와 병사들이 전사했다. 청나라 병사들의 만행을 피하기 위해 사대부 집안의 가족들도 적지 않은 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성안의 관아에 몰려 있던 종실을 비롯한 양반가의 식솔들은 국왕 인조의 차남인 봉림대군(鳳林大君)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급박한 순간에 처한 봉림대군은 무고한 양민의 희생을 피한다는 명분으로 청나라 장수 도르곤[多爾袞]에게 항복의 의사를 전했고, 약탈과 살상 금지 및 신변보호의 보장을 받자마자 곧 관아를 나와서 청군의 진영에 들어가 항복했다. 이때 봉림대군의 명을 받들어 청군 진영을 오가며 협상을 맡은 사람은 원임대신 윤방이었다. 강화도를 평정한 청군은 즉시 섬을 떠나 남한산성으로 향했으며, 포로로 잡힌 대군과 비빈, 종실, 신료 및 그 가족들은 26일에 강화도를 떠나 27일에 남한산성 아래 삼전도에 진을 친 청 태종의 군영에 도착해 분산 수용되었다.

강화도 함몰은 이미 남한산성 농성에 한계를 느끼던 조선 조정이 저항의 의지를 결정적으로 접는 계기가 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이미 저항의지를 잃고 항복의 명분을 찾던 조정에 좋은 구실을 제공했다. 강화협상이 급물살을 탄 때가 바로 26일부터인 점과 인조가 성을 나와 항복한 때가 30일임을 고려할 때, 22일의 강화도 함몰은 사실상 병자호란이 조선의 항복으로 막을 내리는 결정적인 고비였던 것이다. 청군이 철수한 후에 패전의 책임을 물어 사형당한 장수가 거의 없었음을 감안할 때, 유독 강화도 방어를 책임졌던 장신과 김경징이 인조반정 공신의 자제임에도 불구하고 끝내 사형을 당한 사실은 강화도의 함몰과 함께 종실이 포로가 된 상황이 당시 남한산성의 조선 조정에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는지 잘 보여준다.

참고문헌

  • 『강도일기(江都日記)』
  • 『병자록(丙子錄)』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청태종실록(淸太宗實錄)』
  • 『포저집(浦渚集)』
  •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편, 『병자호란사』,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6.
  • 이장희, 「병자호란」, 『한국사 29: 조선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국사편찬위원회, 1995.
  • 한명기,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푸른역사, 2009.
  • 허태구, 「병자호란 강화도 함락의 원인과 책임자 처벌」, 『진단학보』113 , 진단학회, 201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