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동요(甲午東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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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고종 31)에 농민층이 동학 조직을 바탕으로 일으킨 아래로부터의 변혁 운동.

개설

갑오동요(甲午東擾)는 1894년(고종 31) 전봉준 등의 주도로 안으로는 봉건사회의 낡고 썩은 여러 문제를 혁신하고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고자, 농민층이 동학조직을 기반으로 일으킨 반봉건·반침략 변혁운동이다. 이 사건은 역사적 성격과 동학의 역할에 대한 해석에 따라 갑오농민전쟁, 동학농민혁명, 1894년 농민전쟁, 동학농민운동 등으로도 불린다.

『고종실록』에는 1894년에 일어난 대사건을 두고 비도(匪徒), 비류(匪類), 난민(亂民), 패류(悖類), 동비(東匪) 등이 무리지어 다니며 나쁜 짓을 일삼는 소요라 하여 부정적으로 기록해 놓았다(『고종실록』 31년 4월 24일) (『고종실록』 31년 9월 17일) (『고종실록』 31년 10월 29일).

역사적 배경

19세기 조선 사회는 중세 사회가 해체되고 근대 사회로 나아가는 이행기였다. 정치적으로는 왕권이 무력화된 상태에서 과거 제도가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관직을 사고파는 매관매직과 정당한 명목 없이 무작위로 거두는 무명잡세가 성행하였다. 사회·경제적으로는 신분제가 해체되고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로 지주제가 확대되면서 농민층 분해가 가속화되었다.

이는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고 개항이 이루어지면서 더욱 확대·심화되었다. 국가 권력층과 양반 지주층은 중세적인 통치 체제와 부세 제도를 매개로 농민을 억압하고 수탈하였다. 그들은 쌀값이 상승하자 토지 소유를 확대하고 지주제를 강화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한편, 날로 증가하는 소비 지출을 농민들에게 전가하여 지대와 고리대를 비롯해 각종 명목으로 수탈하였다.

이에 맞서 농민층이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들은 사회 변화를 체험하고 체제의 억압성을 의식하면서 봉건 지배층과 외세에 대한 저항을 강화하였다. 농민층의 저항은 1880년대 후반 이후 해가 갈수록 확대되어 1893년에 들어서 절정을 이루었다.

더욱이 1890년대에 전국으로 확산된 동학은 농민들을 각성시키고 하나의 조직으로 묶어내는 역할을 하였다. 뒷날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전봉준·김개남·손화중 등도 모두 이 무렵 동학에 입도하였다. 특히 1892~1893년에 걸쳐 전개된 동학의 교조신원운동은 동학 포교의 자유에서 시작해 반봉건·척왜양(斥倭洋) 운동으로까지 발전하였다(『고종실록』 30년 3월 25일). 이 과정에서 전봉준과 같은 변혁 지향 세력이 결집되었다. 이들은 별도의 동학 집회를 통해 동학 조직을 활용한 혁신 운동의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발단

1892~1893년에 걸친 동학 교조신원운동 이후 여러 변혁 세력은 새로운 기회를 엿보며 활발히 움직였다. 그 중에서도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 내부의 혁신 세력이 두드러졌다. 이들은 1893년 11월 주도 세력을 알 수 없게 참여자의 이름을 빙 둘러 적은 사발통문(沙鉢通文) 같은 것을 배포하여 전국 차원의 봉기를 도모하기 위한 구상을 하며, 그 기회를 엿보았다.

이러한 움직임은 전국적인 농민혁명으로 이어지는 커다란 물줄기로써 기회가 주어지면 언제라도 폭발할 듯한 분위기였는데, 이러한 움직임에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이 1894년 1월 10일의 고부 농민봉기이다. 고부군수조병갑의 수탈과 학정에 시달려온 고부 농민들은 전봉준의 지도하에 봉기하였다. 농민군은 약 2개월에 걸친 투쟁을 통해 읍내의 폐정(弊政)을 바로잡는 데 주력하였으나, 정부의 회유와 탄압으로 3월 13일경에 완전히 해산하였다.

전봉준은 고부 농민봉기의 패색이 짙어진 2월 말부터 새로운 차원의 전면적인 무력투쟁을 준비하였다. 이를 위해 전봉준은 3월 중순경 무장(茂長)으로 가서, 동학 대접주로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던 손화중을 만나 같이 거사를 도모하였다. 전봉준과 손화중은 3월 20일 총봉기 하기로 결의하고 호남창의소(湖南倡義所) 명의로 된 포고문을 반포하였다.

경과

① 무장 기포와 전주성 점령

포고문을 받은 각지의 농민군은 3월 25일 보국안민의 기치 아래 고부 백산(白山)에 집결하였다. 전봉준·손화중·김개남을 비롯해 8천여 명에 이르는 농민군이 참여하였다. 이곳에서 농민군은 전봉준을 대장으로 추대하는 등 조직을 정비하고 투쟁 강령 등을 정하였다.

고부에 집결한 농민군은 태인·금구·부안을 차례로 점령한 뒤, 4월 6일 고부 황토현에서 관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다. 4월 23일에는 장성 황룡촌에서 정부군과 싸워 승리하였다. 드디어 4월 27일 농민군은 호남의 심장부인 전주성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고종실록』 31년 4월 29일).

② 전주화약과 집강소 설치

전주성을 사이에 두고 농민군과 정부군이 대치한 상황에서, 정부는 4월 29일 청나라에 지원병을 요청하였다. 이를 핑계로 일본 역시 5월 2일 출병하였다. 안팎으로 큰 위기를 맞은 정부는 농민군과의 협상에 주력하였다. 그 결과 농민군이 요구한 폐정 개혁 27개조를 국왕에게 보고하고 농민군의 신변을 보장하겠다는 조건으로 5월 8일 전주화약이 체결되었다(『고종실록』 31년 5월 10일).

이를 계기로 농민군과 정부 사이에는 타협 국면이 조성되었다. 정부를 대표하는 전라감사김학진(金鶴鎭)은 농민군에게 집강소(執綱所) 설치를 제의하였으나, 농민군은 김학진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도소(都所)를 설치하는 등 날로 세력을 확대하였다. 전라도는 점점 무정부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자 김학진은 6월 21일 일본군의 궁궐 점령이라는 민족적 위기를 명분으로 내세워 남원에 모인 농민군 지도부에 회담을 제의하였고, 이를 수락한 전봉준과 7월 6일 전주에서 회담을 가졌다.

전주회담에서 대타협을 본 두 사람은 ‘관과 백성이 서로 화합한다’는 관민상화(官民相和)의 원칙에 따라 양쪽이 협력하여 도내의 안정과 치안 질서를 바로잡기로 하고, 그 방법으로 각 고을에 군현 단위의 집강소를 전면적으로 설치하기로 합의하였다.

집강소의 기능은 주로 무기 관리 및 부랑배 단속과 같은 치안 유지와 합법적인 수준에서의 폐정 개혁에 있었다. 이는 농민군의 도소를 집강소 체제로 재편하여, 집강소가 자치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그를 위해 전라감영에는 전라좌우도소(全羅左右都所)를 설치하고 각 지역의 집강소를 관리하면서, 폐정 개혁을 주도하였다.

이와 같은 집강소 체제의 성립으로 7~8월 동안 전라도는 다소 평온을 찾았으나, 그 내부에서는 민과 양반 지배층과의 갈등·대립이 점점 첨예화되고 있었다. 세력을 확대하는 농민층에 맞서 양반층이 민보군(民堡軍)을 조직해 대항하는 지역이 점차 증가하였다(『고종실록』 31년 8월 17일).

그에 따라 관민상화와 그를 위한 집강소 운영은 어려움을 겪었다. 더욱이 6월 21일 일본의 경복궁 점령은 민중들 사이에 대단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이로 인해 전라도를 비롯해 충청도와 경상도 곳곳에서 일본을 상대로 한 재기병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③ 9월 재기병과 항일전쟁

8월 하순에 들어와, 농민군은 본격적으로 다시 봉기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김개남은 8월 25일 대규모의 농민군 대회를 남원에서 개최하였다. 순천의 영호대도소(嶺湖大都所)를 이끌던 김인배(金仁培)는 9월 1일 경상도 하동을 공격하고 진주 방면으로 무력 진출을 꾀하였다. 이러한 재기병의 움직임은 전라도 외에 충청도와 경상도에서도 일어났다. 강원도에서는 9월 4일 농민군 수천 명이 강릉을 습격하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전봉준도 봉기를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봉준은 전라감영에 설치되어 있던 전라좌우도소를 철폐한 뒤, 9월 10일 농민군 총지휘본부인 대도소(大都所)를 삼례에 설치하였다. 이는 곧 7월 6일부터 운영되던 집강소 체제가 무너지고 본격적인 항일전쟁(抗日戰爭)이 시작된 것을 의미한다.

최시형 역시 더 이상 사태를 관망할 수 없었다. 9월 18일 충청도 청산에서 열린 회의에서 군대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최시형은 각지의 동학교도로 하여금 군수전과 군수곡을 마련하여 충청북도 보은 근처로 집결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항일전쟁을 위한 연합전선이 구축되었다. 그러자 전봉준은 서울 진격을 위해 4천여 명의 휘하 부대를 이끌고 10월 12일 전라북도 삼례를 출발하여 충청남도 논산에 도착하였다. 전라북도 남원에 머물러 있던 김개남의 정예부대 8천여 명도 10월 14일 출발하여 전주에 16일 도착하였다. 보은에 있던 동학교단 역시 10월 11일경부터 군대를 움직이기 시작해 충청북도 청산과 영동 방면으로 이동하였고, 손병희가 이끄는 주력 부대는 10월 16일 논산에서 전봉준부대와 합류하였다.

농민군의 공격 목표는 서울로 진격하여 일본과 친일 세력을 축출하는 것이었다. 그를 위해 전봉준부대는 충청남도 공주를 거쳐 서울로, 김개남부대는 충청북도 청주를 거쳐 서울로, 영호대도소의 김인배부대는 경상남도 진주를 거쳐 부산으로의 진출을 기도 하였다. 강원도·황해도에서도 수천 명의 농민군이 봉기하였다.

이에 따라 10월 하순부터 11월 상순에 이르는 동안 충청도를 비롯한 전국에서는 농민군과 일본군 사이에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다. 논산 지역에 머물며 군세를 강화하던 전봉준 주력 부대 1만여 명은 10월 23~25일 공주성 점령을 시도한 뒤 후퇴하였다. 다시 전력을 가다듬은 전봉준부대는 11월 8일 우금치 일대에서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으나, 20여 일에 걸친 공주 공방전은 농민군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고종실록』 31년 11월 16일).

김개남부대도 11월 13일 청주성을 공격하였으나 패하고 후퇴하였다. 영호대도소 김인배부대 역시 진주·하동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패한 뒤 순천으로 퇴각하였다. 이밖에 강원도에서는 11월 5일 1만여 명의 농민군이 민보군과 싸워 졌고, 황해도에서는 10월 29일 농민군 600여 명이 일본군에 패전하였다.

12월에 들어와 농민군 부대는 급격히 와해되거나 전라도 서남단으로 쫓겨났다. 이것은 일본군의 전략이기도 하였다. 일본군은 농민군을 전라도 서남단으로 몰아 ‘싹쓸이’할 작정이었다. 이를 위해 10월 15일 3개 중대를 세 길로 나누어 파견하고 남해안에는 쓰쿠바군함을 띄워 포위 전략을 구사하였다.

이에 맞서 각 농민군 부대는 여러 차례 반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김개남은 12월 1일(『고종실록』 31년 12월 6일), 전봉준은 2일, 손화중은 11일 차례로 체포되었다. 이것으로 소위 농민군 3대 지도자는 모두 체포되었다. 동학교단 소속 농민군은 12월 18일 보은 북실 전투를 끝으로 해산하였다. 이것으로 1894년 10월 하순부터 12월까지 조선 전역을 피로 물들게 한 항일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참고문헌

  • 김양식, 『근대한국의 사회변동과 농민전쟁』, 신서원, 1996.
  • 배항섭, 『조선후기 민중운동과 동학농민전쟁의 발발』, 경인문화사, 2002.
  •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 민중의 함성 동학농민전쟁』, 한길사, 2003.
  • 趙景達, 『異端の民衆反亂』, 岩波書店,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