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여술(堪輿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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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漢代)에 많이 사용된 풍수의 초기 명칭.

개설

풍수라는 용어가 나타나기 이전부터 쓰인 입지 선정 기술에 대한 명칭이다. 허신(許愼)은 감(堪)은 천도이며, 여(輿)는 지도라는 개념 정의에서 알 수 있듯, 하늘과 땅의 이치를 모두 포함하여 입지를 고르려 했던 것이 감여술이다. 고려 때까지 비교적 천문과 지리를 포함하여 풍수 행위가 이루어졌다면 조선조에 들어와서 천문 영역이 약해지고 지리 영역을 위주로 입지 선정에 고려된다.

내용 및 특징

감여라는 말은 『회남자(淮南子)』「천문훈(天文訓)」에 처음 보이는데 천지, 천지의 법칙에 의거해서 길흉을 판단하는 것 등으로 설명하였다. 또 『사기(史記)』에서는 택일과 관련하여 감여가를 들고 있으며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천지의 도라는 설명과 함께 대개 감(堪)은 높은 곳을, 여(輿)는 낮은 곳을 나타내는 것으로 하늘은 높고 땅은 낮다는 뜻으로 정의내리고 있다.

1406년(태종 6), 하윤(河崙)의 건의로 십학(十學)이 설치될 때 감여술은 음양풍수학이란 이름으로 포함된다(『태종실록』 6년 11월 15일). 이때 음양풍수학에서 활용되던 풍수 서적들은 고려가 송나라와 원나라로부터 들여온 풍수 서적들이었다. 그로부터 200년이 지나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명나라의 군대가 조선에 들어온다. 이때 명나라 군대를 따라 풍수 전문가들이 함께 들어오면서 새로운 풍수지리가 유입된다. 그와 동시에 감여술의 내용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다. 동시에 유학을 국교로 하는 조선에서 주자(朱子)와 정자(程子)가 높게 평가될 수밖에 없었다.

변천

감여란 용어가 풍수보다 먼저 나왔으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선조 때 주로 언급된다. 감여술보다는 조선시대 초기부터 지리설 혹은 풍수설이라는 용어가 더 많이 활용된다.

참고문헌

  • 『사기(史記)』
  • 『논형(論衡)』
  • 『발미론(發微論)』
  • 『산릉의장(山陵議狀)』
  • 『서경잡기(西京雜記)』
  • 『장설(葬設)』
  • 『회남자(淮南子)』
  • 김두규, 『조선 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 궁리출판사, 2000.
  • 김혜정, 『중국 고전의 풍수지리 사상』, ㈜한국학술정보, 2008.
  • 김혜정, 『풍수지리학의 천문사상』, ㈜한국학술정보, 2008.
  • 서선계·서선술 저, 김동규 역, 『인자수지』, 불교출판사, 1989.
  • 최창조 역주, 『청오경·금낭경』, 민음사, 1993.
  • 段玉裁 注, 『說文解字注』, 臺灣 天工書局, 1997.
  • 劉安 著·趙宗乙 訳注, 『淮南子訳注』, 黒龍江人民出版社,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