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로사(개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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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 국가에서 공인한 36사(寺) 가운데 하나로, 경기도 개풍군 오봉봉 아래에 위치한 절.

개설

감로사(甘露寺)는 경기도 개풍군 중서면 오봉봉(五鳳峰) 아래에 위치한 사찰로 11세기에 창건된 고려시대 개경의 유력한 사찰이었다. 조선에 들어서도 세종대에 설립된 선·교 양종 가운데 교종 18개 사찰에 들어갔다. 원경왕후의 친정인 여흥민씨 가문에서 지원한 사찰이기도 했으며, 조선전기에 왕실 불교와 밀접한 관련을 가졌다.

연원

고려의 유력 문벌귀족이자 문종의 장인인 이자연(李子淵)이 창건한 사찰이다. 이자연은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윤주(潤州) 감로사의 절경을 보고 돌아와 이 절을 세웠다고 한다. 감로사는 고려 왕실의 원찰로서, 이자연의 딸인 인예왕후가 이 절에서 기도를 하여 숙종 등을 낳았다고 한다. 김부식(金富軾), 이규보(李奎報), 이색(李穡), 권근(權近) 등의 유명 문사들도 자주 찾아 시문을 남겼다.

변천

태종대인 1406년(태종 6)에는 국가 지정 11개 종파 242개를 제외한 전국 사찰의 토지와 노비가 속공되었다(『태종실록』 6년 3월 27일). 다음 해에는 불교 종파가 조계종, 천태종, 화엄종, 자은종, 시흥종, 중신종, 총남종의 7개로 축소 통합되었고, 이때 242개 사찰 가운데 기존의 읍내 자복사(資福寺) 88개가 명산의 대찰로 대체되었다(『태종실록』 7년 12월 2일). 자복사는 고려시대 각 지역의 중심지에 위치했던 비보사(裨補寺)로서, 조선의 지역 질서 개편과 연동하여 고려의 유산을 혁파하고 산간에 있는 명찰로 대체한 것이다.

당시 자은종 소속 36개 사찰 가운데 감로사를 비롯해 관음사(觀音寺)>, 성주사(聖住寺), 성불사(成佛寺), 신이사(神異寺) 등 17개 사찰이 새로 편입되었다. 하지만 여기에 새로 포함된 감로사는 경상도 김해에 있던 절로, 개성에 위치한 감로사와는 다른 사찰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의 개성(開城) 항목을 보면, 세종대 교종에 속하게 된 감로사는 개성 벽란도 동쪽에 있으며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절경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세종대에는 모후 원경왕후의 가문에서 시주했던 감로사 노비 100명을 경기도 고양의 대자암(大慈菴)으로 옮기라는 명이 내려졌고, 이 노비들은 이후 숭효사(崇孝寺)와 태종의 이궁인 수강궁(壽康宮)으로 재차 이속되었다(『세종실록』 1년 2월 22일). 1424년(세종 6) 세종은 기존의 7개 종단을 선·교 양종으로 나누고 각각 18개씩 36개 사찰만 공인하였는데, 이때 감로사는 교종 18사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 감로사는 원래 가지고 있던 40결에 160결의 토지가 추가로 지급되어 총 200결을 보유하게 되었고 거주 승려는 100명으로 정해졌다(『세종실록』 6년 4월 5일). 이후 세종은 감로사를 비롯해 지장사(地蕆寺) 등 4개 사찰의 노비는 외가인 민씨 가문에서 예로부터 시주한 것으로서 태종대에 사원노비를 혁파할 때도 모두 본궁에 소속시키게 하였다(『세종실록』 25년 2월 13일).

숙종대에는 송시열(宋時烈)과 윤증(尹拯)이 감로사에서 만나거나 박세채(朴世采) 등이 회동을 한 일이 기록되고 있어(『숙종실록』 43년 12월 10일) (『숙종실록』 42년 3월 3일), 조선후기에도 존속하였음을 알 수 있지만 구체적 실상은 알려져 있지 않고 현재는 폐사된 상태이다.

참고문헌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탁효정, 「조선시대 왕실원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2.
  • 高橋亨, 『李朝佛敎』, 寶文館, 192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