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계사(勘界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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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고종 22)과 1887년(고종 24)에 조선과 청나라가 간도에 이주한 조선인의 처리와 국경선 정비를 위하여 논의한 감계회담에서 조선 측 대표를 맡은 관리의 지위.

개설

19세기 말에 함경도에 거주하던 조선인이 대규모로 간도로 이주하였다. 19세기 중반까지 농번기와 수확기에만 한시적으로 간도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이 이제는 상주하는 상황으로 변하였다. 청나라로서는 러시아의 연해주 점령 이후 국경과 영토에 대한 인식이 강화되어 간도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을 청나라 호적에 강제로 넣으려고 하였다. 반면 간도 거주 조선인들은 청국화를 반대하며 조선 정부에게 간도가 원래 조선 영토임을 강조하며 청나라와 국경 협상을 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청나라에서도 조선 정부와 새롭게 국경선을 정비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이에 따라 양국은 국경선이 확정되지 않았던 백두산과 두만강 연변을 조사하기 위하여 중앙 관원을 파견하였다. 조선에서는 안변 부사(安邊府使)였던 이중하(李重夏)를 토문감계사(土們勘界使)로 임명하고, 교섭아문(交涉衙門) 주사(主事)조창식(趙昌植)을 토문감계종사관(土們勘界從事官)으로 임명하여 회담에 임하도록 하였다. 청나라에서는 감계회담(勘界會談)에 독리상무위원(督理商務委員)진영(秦煐), 혼춘(琿春) 승판처(承辦處)덕옥(德玉), 변황사(邊荒事)가원계(賈元桂)를 대표 위원으로 파견하였다.

담당 직무

1885년(고종 22) 조선 정부에서 파견한 대표단의 감계사(勘界使)는이중하였다(『고종실록』 22년 7월 30일). 이중하의 자는 후경(厚卿), 호는 이아당(二雅堂)·규당(圭堂) 또는 탄재(坦齋)였다. 전주이씨 광평대군(廣平大君) 정안부정공파(定安副正公派) 17세손으로 1846년(헌종 12) 11월 9일 경기도 양평군(楊平郡) 창대리(倉垈里)에서 현감을 지낸 이인식(李寅植)의 아들로 출생하여 1917년에 사망하였다. 1882년(고종 19)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에 급제한 뒤 관찰사와 외부협판, 장예원경 등을 역임한 정부 고위 관료였다. 그는 감계사로 파견된 뒤 전례에 따라 청나라 대표를 상국(上國)의 예로 응대하였다. 이중하는 청나라 측 대표인 진영·덕옥·가원계 등과 함께 백두산의 백두산정계비와 토문강(土門江)이 흐르는 연변을 답사하고 현지에서 계속 국경선의 지정 문제를 논의하였다. 당시의 기록인 『감계사등록』을 보면, 모든 회담을 필사로 진행하였다. 진영 등 청나라 감계위원들은 시종 상국의 입장을 취하며 강압적인 태도로 조선의 감계사를 대하여 회담이 자주 결렬되었다. 감계사이중하는 1886년(고종 23) 덕원항감리(德源港監理)였다가 1887년(고종 24)에 열린 정해 감계회담의 대표를 다시 맡았다. 이때 청나라의 감계위원들이 회담처에서 이중하가 주장하는 국경선 의견을 무시하고 위협하였는데, 이중하는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국경은 줄일 수 없다[吾頭可斷, 國疆不可縮].”면서 끝내 양보하지 않았다.

변천

감계사는 조선 정부가 청나라·일본·러시아의 간섭 하에 놓이게 되면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었다. 또한 간도의 조선인 문제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을사조약 등을 거치면서 조선 정부의 관심사에서 벗어났다. 그런데 1907년(순종 즉위) 2월 1일에 통감부가 간도에 임시간도파출소를 설치하면서 재차 감계 문제가 대두되었다. 간도파출소는 간도 용정촌(龍井村)에서 사무를 시작하였다. 통감부에서는 간도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주저하였다. 감계사이중하가 주장하였던 간도 영역설의 근거를 확증할 수 없다는 이유로 청나라와 경계론(境界論)을 다투는 것은 불리하다고 보았다. 오히려 일본 정부는 간도 문제를 이용하여 만주 진출의 기회로 삼고자 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감계사등록(勘界使謄錄)』
  • 『통감부문서(統監府文書)』
  • 송양섭·양승률·이왕무·정욱재, 『역주 통감부임시간도파출소기요』, 동북아역사재단, 2013.
  • 이왕무·양승률·서동일·정욱재, 『역주 감계사등록』 1, 동북아역사재단, 2008.
  • 이왕무·양승률·서동일·정욱재, 『역주 감계사등록』 2, 동북아역사재단, 2010.
  • 이왕무, 「19세기말 조선의 疆域인식 변화-李重夏의 『勘界事謄錄』을 중심으로-」, 『역사와실학』 37,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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