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경인(甘景仁)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1569년(선조 2)∼1648년(인조 26) = 80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의 무신. 행직(行職)은 감포만호(甘浦萬戶)이다. 자(字)는 여일(汝一)이고, 호(號)는 관술정(觀術亭)이다. 본관은 회산(檜山)이고, 출생지는 경상남도 창원이다. 아버지는 감예종(甘禮從)이며, 어머니 반남박씨(潘南朴氏)는 박종(朴宗)의 딸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88년(선조 21) 무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 감경륜(甘景倫)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섬을 지켰다. 이후 충무공 이순신의 휘하에서 선봉장이 되어 전공을 세우면서 선조로부터 표리(表裏) 1벌을 하사받고, 여도만호(呂島萬戶)에 임명되었다. 이어 내금위의 정략장군(定略將軍)이 되었으며, 1604년(선조 37)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묘지명]

1606년(선조 39) 부사과(副司果)전계신(全繼信)의 문위행(問慰行)에 군관(軍官)으로서 대마도(對馬島)에 파견되었다. 이들은 조선이 제시한 강화조건, 즉 덕천가강(德川家康)이 먼저 국서(國書)를 보내고, 임진왜란 때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파헤친 범인을 붙잡아 보내야 한다는 조건에 대한 이행 여부를 확인하고 아울러 일본의 정세를 탐지하기 위하여 파견되었다. 도주(島主)인 소 요시토시[宗義智]와 교섭한 결과, 마침내 덕천가강의 국서 사본을 지참하고, 왕릉(王陵)을 훼손한 두 명의 범인과 함께 조선 피로인 174명을 데리고 돌아왔다.[『해행록(海行錄)』]

인조 시대 활동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동생 감경륜과 함께 다시 의병을 일으켜 상산(商山: 지금의 상주(商州))까지 갔으나,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625년(인조 3)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묘지명]

1628년(인조 6) 인조에게 민심을 바르게 하고, 재해에 대비하며, 부역을 관대하게 하는 등 8개 조목(條目)을 상소하였는데, 왕이 가납(嘉納)하였을 뿐 아니라, 감경인에게 상당한 직책에 임명하도록 하였다.[『인조실록』 6년 9월 30일 4번째기사]

1633년(인조 11) 감포 만호(甘浦萬戶)가 되었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인조 11년 6월 22일] 저서로는 『삼렬당문집(三烈堂文集)』이 있다.

1648년(인조 26) 죽었는데, 향년이 80세였다.

성품과 일화

용모는 크고 건장하고, 성품은 절조가 있고 강개하였으며, 계책과 지략이 뛰어났다. 글을 배우는데도 힘썼을 뿐 아니라, 무예(武藝)에도 능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동생 현감(縣監)감경륜(甘景倫)에게 “주상이 욕을 당하였는데 국가의 은혜를 입은 몸으로 어찌 내 한 몸을 아끼겠는가.” 라고 하고, 드디어 동생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외딴 섬을 지켰다. 이어 충무공 이순신의 군영으로 가서 선봉(先鋒)이 될 것을 자원하였다. 왜적이 쳐들어오자 그는 몸을 솟구쳐 뛰어나가 왜적 6명의 수급(首級)을 참하였는데, 군중(軍中)이 모두 그의 용기에 고무되어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묘지명]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상남도 창원의 반룡산(盤龍山)의 내동(內洞)에 있는데,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이 지은 묘지명이 남아있다. 그가 죽은 뒤 조정으로부터 삼렬(三烈)이라는 사호(祠號)를 받고 삼렬사(三烈祠)에 봉안되었다.

부인은 교하노씨(交河盧氏)노경종(盧景宗)의 딸인데, 자녀는 2남을 두었다. 장남 감빈(甘薲)은 참의(參議)를 지냈고, 차남 감면(甘葂)은 주부(主簿)를 지냈다.[묘지명]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 『만구집(晩求集)』
  • 『삼렬당문집(三烈堂文集)』
  •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 『척암집(拓菴集)』
  • 『해행록(海行錄)』
  • 『회당집(晦堂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