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성군(杆城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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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영동 북부인 간성 지방을 다스리던 관아. 조선시대 간성 지방을 관할하던 관청 및 행정기구.

개설

간성군은 995년(고려 성종 14)에 현령(縣令)으로 편제되었다. 이후에 고성과 통합되면서 간성군으로 승격되었다. 공양왕 때 간성군과 고성군으로 분리되었고,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조선시대에도 간성은 군으로 존속되었고, 후기에 민가는 580호 정도였다(『정조실록』 23년 12월 29일). 1895년(고종 32) 23부제에서 간성군은 강릉부 관할로 편제되었고, 이듬해 13도제에서는 강원도 관할로 편제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구려에서는 수성군(䢘城郡) 혹은 가라홀(加羅忽)이라 하였으며, 신라 경덕왕 때 수성군(守城郡)으로 개명되었다.

고려 995년(고려 성종 14) 10도제에서 삭방도(朔方道)의 간성현으로 편제되었다. 1018년(고려 현종 9) 간성현은 고성과 통합되면서 간성군으로 승격되었다. 1389년(고려 공양왕 1)에 간성군에서 고성현이 분리되었다.

조선 1413년(태종 13) 8도제에서 강원도의 간성군으로 편제되었다. 1455년(세조 1)에 군익도(軍翼道) 체제에 따라 고성도(高城道)를 설치하고, 고성은 중익(中翼)으로, 간성은 우익(右翼)으로 편제하였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7년(세조 3)에 군익도, 즉 3익(三翼) 체제를 폐지하고 거진(巨鎭)을 설치하는 진관(鎭管) 체제에서 간성진(杆城鎭)을 설치하고 고성·통천·흡곡 등을 관장하였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1604년(선조 37) 간성군 인근에 북관(北關)을 두고 군수(郡守)를 겸한 조방장(助防將)을 뽑아 당상(堂上) 무신(武臣)으로 하였고, 1623년(인조 1)에 폐지하고 다시 무신을 두지 않았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1629년(인조 7) 군내에서 종[奴]이 주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 군에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0년이 지난 후 다시 군으로 승격되었다.

조직 및 역할

조선초기에 군수(郡守)와 훈도(訓導) 각 1인을 배치하였다. 조선후기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 군수는 4품 음관(蔭官)직이고, 예하의 향청(鄕廳)에는 좌수 1인과 별감 2인을 두었다. 육방(六房) 관속으로는 군관(軍官) 30인, 아전(衙前) 40인, 지인(知印) 20인을 두었다. 그리고 사령(使令) 25명, 관노(官奴) 18명, 관비(官婢) 10명을 두었다. 육방 관속은 객사(客舍), 아사(衙舍), 군기고(軍器庫), 관청(官廳), 상정청(詳定廳), 군사(郡司), 향청, 훈련청(訓練廳), 군관청(軍官廳), 군학당(郡學堂), 작청(作廳), 지인청(知印廳), 군청(軍廳), 사령청(使令廳), 관노청(官奴廳) 등에 배속되어 행정 실무를 담당하였다. 이들 가운데 호장(戶長)을 비롯한 상층부 인사들을 향리(鄕吏)라 하였는데, 이들은 수령을 보좌하면서 행정 실무를 주도하는 계층이었다.

변천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편에 따라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제를 시행하면서 강원도는 강릉부와 춘천부로 분할되었다. 아울러 부제의 하부조직으로 군현제를 폐지하고 군제로 일원화하였다. 이때 간성은 간성군으로 강릉부에 편제되었다. 1896년(고종 33) 23부제를 폐지하고 13도제를 시행하면서 춘천부와 강릉부는 합쳐서 강원도에 편제되었고, 간성군은 강원도에 귀속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관동읍지(關東邑誌)』
  • 『관동지(關東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강원도·고성군,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 고성문화원, 『간성군 읍지(수성지)』, 강원일보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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