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판(刻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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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판에 내용을 판각한 목판 또는 나무판에 내용을 새기는 행위.

개설

각판(刻板)은 나무판에 글씨나 그림 등을 새긴 책판(冊板)을 의미하며, 이렇게 만들어진 판본을 목판본이라고 통칭한다. 각판은 그 밖에 나무판에 내용을 새기는 행위 자체를 뜻하기도 한다.

내용 및 특징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706~751년경)과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1377년)을 보유하고 있는 한국은 고대로부터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 필사, 목판(木板), 활자, 석판 등의 인쇄 수단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서적을 생산해왔다.

이 중에서도 특히 목판은 필사 다음으로 가장 오랫동안 널리 사용되었던 인쇄 수단이다. 각판은 바로 나무판에 내용을 새긴 목판 또는 나무판에 내용을 새기는 행위를 뜻한다. 전자는 활판(活板)에 반대되는 의미로서 목판·책판이라고 하며, 이러한 방식으로 인출한 서적은 목판본·간각본(刊刻本)·각판본(刻板本)·판각본(板刻本)·누판본(鏤板本)이라고 한다. 각판(刻版)·판각(板刻)·조판(雕板)·간각(刊刻)·누판(鏤板) 등은 각판과 같이 두 가지의 뜻을 모두 가지고 있다.

각판이 목판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 예는 몽고군의 침입으로 부인사(符印寺)에 소장되어 있던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 소실되자, 1237년(고려 고종 24)에 이규보(李奎報)가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의 간행을 통해 전란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하면서 작성한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이때 언급한 대장각판(大藏刻板)은 대장경을 새긴 책판을 뜻한다. 또한 1431년(세종 13)에 『원육전(元六典)』을 인쇄하려고 할 때 각판이 훼손되어 강원도에 명하여 보수 후에 인출하도록 했던 기록(『세종실록』 13년 5월 13일)과, 1575년(선조 8)에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인출할 적에 『맹자』, 『중용』, 『서경』, 『주역』의 각판은 마모된 부분이 많으므로 서둘러서 판각하게 한 기록(『선조실록』 8년 3월 7일)이 있다. 여기서 사용된 각판이라는 용어는 인출하기에 앞서 목판에 새긴 책판을 의미한다. 최립(崔岦)이 평양에서 『맹자대문(孟子大文)』을 간행한 후에 작성한 「평양각판맹자대문발(平壤刻板孟子大文跋)」의 경우에도 각판은 책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각판이 판각하는 행위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된 예는 성몽정(成夢井)이 지은 백관계유문(百官戒諭文)을 관청에 명하여 각판하여 게시하도록 한 기록(『연산군일기』 11년 11월 16일)과, 1569년(선조 2)에 저속하고 외설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전등신화(剪燈新話)』를 교서관(校書館)에서 각판하였다는 기록(『선조실록』 2년 6월 20일)에서 찾을 수 있다.

중국의 경우, 이미 10세기 이전에 판에 새기는 행위를 의미하는 용어로 각판이 사용되었다. 예컨대 932년(후당 장흥 3)에 후당(後唐)의 재상이던 풍도(馮道)가 판국자감사(判國子監事)전민(田敏)에게 석경(石經) 『구경(九經)』을 교정하도록 한 후 각판하여 판매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고, 952년(후주 광순 2)에는 무소예(毋昭裔)가 개인 재산으로 학관(學館)을 세우고 『구경』을 각판하여 인출할 수 있도록 청한 것을 들 수 있다.

변천

고려시대의 목판인쇄에는 신라시대의 인쇄술을 계승한 목판인쇄의 발달로 일찍부터 중앙관서인 비서성(秘書省)·비서감(秘書監)·전교서(典校署)·서적포(書籍鋪)·서적점(書籍店)과 지방관서 및 사찰을 중심으로 수많은 서적이 간행되었다. 문종 때에 이르러서는 이미 국가 전적이 방대하게 갖추어져서 널리 중국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사찰은 고려시대 인쇄문화의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곳으로, 각종 불교서적이 전국적으로 간행되었다. 대표적인 목판인쇄물은 1007년(고려 목종 10)에 개성의 총지사(摠持寺)에서 간행한 『보협인다라니경(寶篋印陀羅尼經)』, 1011년(고려 현종 2)에 간행을 시작하여 1087년(고려 선종 4)에 마무리된 『초조대장경』, 1092년(고려 선종 9)에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한 후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을 토대로 간행을 시작하여 1102년(고려 숙종 7)에 끝마친 『교장(敎藏)』,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여 1236년(고려 고종 23)에서 1251년(고려 고종 38)에 걸쳐 간행한 『재조대장경』 등이 있다.

조선시대의 목판인쇄는 중앙과 지방의 관청을 비롯하여 사찰, 서원, 향교, 개인, 서점 등 다양한 간행 주체에 의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간행 주체별로 살펴볼 때 중앙관청의 경우 교서관·주자소(鑄字所)·규장각(奎章閣)에서 출판을 주도했고, 간경도감(刊經都監)·정음청(正音廳)·언문청(諺文廳)·주자도감(鑄字都監)·녹훈도감(錄勳都監)·실록청(實錄廳)·의궤청(儀軌廳)을 한시적으로 설치하여 서적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관상감(觀象監)·사역원(司譯院)·춘방(春坊)·종부시(宗簿寺)·내의원(內醫院)·군기시(軍器寺)·혜민서(惠民署)·장악원(掌樂院)·성균관(成均館)·봉모당(奉謨堂)·시강원(侍講院)·장용영(壯勇營) 등에서는 본연의 업무 외에도 기관에서 필요한 서적을 자체적으로 간행하고 보관하였다. 지방관청에서의 서적 출판은 팔도에 소재한 감영인 경기도의 기영(畿營), 충청도의 금영(錦營), 경상도의 영영(嶺營), 전라도의 완영(完營), 황해도의 해영(海營), 강원도의 원영(原營), 함경도의 함영(咸營), 평안도의 기영(箕營)과 각 감영에 소속된 부(府)·목(牧)·군(郡)·현(縣)이 중앙관청에서 내려준 서적을 번각(飜刻)하거나, 관찰사나 수령이 개인적인 기호나 주변의 요청 및 지역 사회의 수요에 부응하여 서적을 간행하였다.

고려시대에 인쇄의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사찰은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억불정책에 따라 간행이 다소 위축되었지만 민간의 시주에 의해 여전히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곳에서 간행된 서적에는 불경을 비롯하여 문중(門中)의 요청에 따른 문집이나 족보(族譜) 등의 서적들도 포함된다. 서원(書院)에서는 16세기 무렵부터 서원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배향(配享)된 인물의 문집이나 실기(實記) 및 유고(遺稿)를 비롯하여 서원에서 필요한 교재를 자체적으로 간행하였다. 향교에서는 교육용이나 과거 수험서를 중심으로 서적을 간행했다. 문중이나 개인은 불서와 시문집 및 족보를 간행하였는데, 16세기 후반부터는 가문을 빛내고 양반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시문집과 족보를 광범위하게 간행하였다. 서점의 출판활동은 중국의 경우에 이미 송 대부터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반면에 조선은 19세기가 되어서야 본격화되었다. 이처럼 영리를 목적으로 간행한 서적을 방각본(坊刻本)이라고 부르며, 주로 아동 학습서를 비롯해 과거 수험서, 일용서적, 한글 소설 등이 간행되었다.

참고문헌

  •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 『자치통감(資治通鑑)』
  • 천혜봉, 『한국서지학』, 민음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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