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릉식례(各陵式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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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왕실의 능침 관리를 궁내부에서 관장하고자 제정한 규정.

개설

각릉식례(各陵式例)는 조선 왕조가 1894년 말 대한제국 체제를 구축하면서 황제국에 걸맞는 제도를 개정할 때 왕실의 궁‧능‧원‧묘의 관리 제도를 궁내부에서 일관되게 주관하고자 제정한 것이다.

내용 및 특징

갑오개혁 이전부터 능‧원‧묘의 의례 절차는 개정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1870년(고종 7)에는 효창묘(孝昌墓) 등 세자나 세손의 각 묘소에 전배할 때의 의복 색을 능침과 차이를 두도록 하였다(『고종실록』 7년 10월 5일). 특히 『오례편고(五禮便攷)』를 편찬하면서 각 능침의 제사 의식을 변경하였다. 이때 향례(享禮) 의절(儀節)을 정리한 까닭은 각 능침에 차려놓는 제물 규례가 달랐기 때문이다. 정조와 순조대에 태상시(太常寺)에서 제사 의식 절차를 그린 병풍을 만들기도 했으나 단일한 규례를 만들지 못했다. 『오례편고』에는 건원릉(健元陵)에 진설하는 도식(圖式)을 게재하게 하여 그것에 준해 각 능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고종실록』 7년 11월 25일). 1891년(고종 28)에는 예조의 낭청이 능원의 비각과 정자각의 제기(祭器)들을 살피면서 능‧원‧묘도 봉심(奉審)하는 절차를 만들었다(『고종실록』 28년 6월 11일). 그런데 갑오개혁 이전의 능‧원‧묘 의례는 왕실과 의정부 등 산재된 부서에서 진행한 것에 반해 개혁 이후에는 궁내부에서 전담하여 관여하게 되었다는 것이 큰 차이점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각릉식례(各陵式例)』이다.

1894년(고종 31) 11월에 1895년(고종 32) 역서(曆書)를 조선 개국(開國) 기원으로 간행하였고, 궁내부에서 동지(冬至) 이후의 종묘‧사직‧전(殿)‧궁(宮)‧능(陵)‧원(園)에 지내는 제사의 축문(祝文) 규례를 역서에 맞추어 수정하도록 하였다(『고종실록』 31년 11월 20일). 궁내부에서는 새로운 역서에 따라 제사 진행을 수정하면서 『각릉식례』를 12월에 완성하였다. 당시 궁내부(宮內府) 대신겸대종백(大臣兼大宗伯)이재면(李載冕)이 『각릉식례』를 보고했는데, 그 세부 내용인 절목 7개는 다음과 같다.

① 각 능에서 사용할 향(香)과 축문은 해마다 1월 14일에 1년간 쓸 것을 일제히 전부 받는다.

② 각 능에서 특별히 내려주는 쌀은 매 석(石)을 시가대로 적당히 값을 정하여 양주목(楊州牧)에서 내준다.

③ 각 능에서 명절 제사에 사용할 향을 받을 때에는 같은 구역 안의 능에서는 능의 관리가 수복(守僕)을 거느리고 돌아다니고, 향과 축문을 모두 받들어 구역 안의 가장 높은 능에 봉안하고 각 능의 관리들이 받게 한다.

④ 각 능에 부속된 토지의 세입에 대한 지출은 능에서 조사하는 관리를 임명하여 실지대로 조사하여 지출을 정한다.

⑤ 각 능의 수리비는 능마다 200냥씩 탁지아문(度支衙門)에서 직접 해당 지방 읍에 할당하여 해당 능에 바치게 한다. 곡장(曲牆)을 수리하고 정자각(丁字閣)‧비각(碑閣)‧수라간(水刺間)‧수복방(守僕房)‧재실(齋室)의 비가 새는 곳과 담장 수리를 하되, 만일 잘 수리하지 않았다가 봉심하여 살필 때에 드러나는 경우에는 해당 능의 서원(書員)과 수복을 엄하게 다스린다. 그 밖에도 수리한 비용을 전적으로 부담시키며, 소비한 해당 능의 관리에게는 2등에 한하여 월봉(越俸)한다.

⑥ 각 능에 사초(莎草)를 바꾸거나 도배를 하고 창문을 바르는 것은 해당 능에서 하되 사초를 바꾸는 비용 50냥과 도배지 비용 50냥은 해마다 2월에 지방 읍에서 보낸다.

⑦ 각 원과 묘(墓)에서도 모두 이 규례대로 한다(『고종실록』 31년 12월 23일).

당시 내각에서는 『각릉식례』의 발표에 앞서 주상전하(主上殿下)를 대군주폐하(大君主陛下), 왕대비전하(王大妃殿下)를 왕태후폐하(王太后陛下), 왕비전하(王妃殿下)를 왕후폐하(王后陛下), 왕세자저하(王世子邸下)를 왕태자전하(王太子殿下), 왕세자빈저하(王世子嬪邸下)를 왕태자비전하(王太子妃殿下), 전문(箋文)을 표문(表文)으로 하기로 하여 황제국 체제로 의례를 변경하였다(『고종실록』 31년 12월 17일). 따라서 『각릉식례』는 능‧원‧묘의 절차를 수정하는 것만이 아닌 조선 왕실이 대한제국 황실로 변모하던 과정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변천

1905년(고종 42) 통감정치기를 거치면서 궁내부의 예산을 삭감시키는 방안으로 각 능의 식례를 개정하였다. 1907년(고종 44) 3월에 궁내부 관제를 개정하면서, 포달(布達) 제150호인 종묘와 사직, 전, 궁, 각 능, 원, 묘 관제 중 개정에 관한 안건[廟社殿宮各陵園墓官制中改正件]을 반포하였다(『고종실록』 44년 3월 4일). 또한 1908년(순종 1) 3월에도 포달 제172호인 종묘와 사직, 전, 궁, 각 능, 원, 단, 묘의 관제 개정 및 첨입에 관한 안건[廟社殿宮各陵園壇墓官制改正及添入件]을 반포하였다(『순종실록』 1년 3월 14일). 1910년(순종 3) 한일병합 이후 각 능의 식례는 이왕직에서 주관하였고 도시 개발에 따른 능‧원‧묘 영역의 조정에 따라 재차 개정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대한예전(大韓禮典)』
  •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1967.
  • 국사편찬위원회,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986.
  • 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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