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라만복(覺羅萬復, 覺羅萬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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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제대 청의 산질대신(散秩大臣)기오로 완푸([覺羅萬福], gioro wanfu)의 한자 이름.

개설

기오로 완푸는 청건륭 연간에 시위처(侍衛處)의 산질대신이었다. 처음에는 한군(漢軍) 양백기(鑲白旗)의 부도통을 지냈고, 이후에는 만주(滿洲) 양남기(鑲藍旗)의 부도통이 되었으며, 1781년 강녕장군(江寧將軍)으로 임명되었다. 1785년에 죽은 뒤에 아들 각라길경(覺羅吉慶)이 그의 직위를 세습하였다. 각라만복(覺羅萬復)이라고도 하였다.

가계

기오로 완푸의 아들 각라길경은 정백기(正白旗)에 속하였다. 관학(官學)에서 학습하였으며, 내각(內閣) 중서(中書), 시독관(試讀官)을 지냈다. 1785년 기오로 완푸가 죽은 뒤 그의 지위를 세습하였다. 몽골 양백기의 부도통이 되었다가 병부 시랑(兵部侍郞)을 역임하였다. 이후에 산동순무(山東巡撫)를 지내고, 양광총독(兩廣總督)으로 발탁되었다.

활동 사항

기오로 완푸는 산질대신이었다. 산질대신은 청순치 연간에 설치된 시위처의 관원이었다. 시위처는 팔기(八旗) 가운데 상삼기(上三旗)에서 각 2명씩 선발하여, 정1품 영시위내대신(領侍衛內大臣)과 종1품 내대신(內大臣)을 각각 6명씩 두고 시위친군(侍衛親軍)을 통솔하여 황제를 호위하는 관서였다. 산질대신은 종2품에 해당하여 내대신의 아래에 위치하였으며, 정원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시위처의 관원들은 황제의 권력을 보좌하는 역할을 하였던 만큼 엘리트에 해당하는 인물들이었다.

기오로 완푸는 1776년 조선의 왕 영조(英祖)가 세상을 떠나고 세손(世孫) 정조(正祖)가 왕위에 오르자 조선에 칙사로 파견되었다. 이해 9월 4일 패문(牌文)이 먼저 발송되어 24일에 경성(京城)으로 들어왔고, 상사(上使)기오로 완푸와 부사(副使)숭귀(嵩貴), 5명의 통관 등으로 구성된 칙사 일행은 9월 11일에 회동관(會同館)에서 출발하여 10월 12일에 압록강을 건넜고, 같은 달 27일에 입경하였다. 그는 산질대신 겸 양백기 한군부도통 세습운기위 세습좌령가삼급(散秩大臣兼鑲白旗漢軍副都統世襲雲騎尉世襲佐領加三級)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보왕칙서(封王勅書), 진종대왕(眞宗大王)과 그 왕비의 추숭(追崇) 고명 1통씩, 영조에 대한 제문과 금천(金川)을 토평하였다는 조서와 황태후에게 존호를 올렸다는 조서 등을 가지고 왔다. 영조는 모화관(慕華館)에서 기오로 완푸 등을 맞이하였고, 조문과 조제를 행한 뒤에 접견하여 다례를 행하였다. 칙사 기오로 완푸 일행은 11월 2일에 경성을 떠나 18일에 압록강을 건너 돌아갔다(『정조실록』 즉위년 10월 27일).

참고문헌

  • 『청사고(淸史稿)』
  • 『동문휘고(同文彙考)』
  • 『淸高宗實錄』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