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파지보(茄乙波知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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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함경남도 삼수군에 속한 첨절제사진.

개설

가을파지보는 처음에는 평안도의 강계도호부에 속하였고, 북쪽으로 무창군(茂昌郡), 동쪽으로는 함경도의 갑산도호부(甲山都護府)와 접하였다. 함경도의 갑산 소속 삼수보(三水堡)를 떼어 군으로 고치는 과정에서 삼수군(三水郡)에 편입되었고, 이로써 평안도가 아닌 함경남도에 속하게 되었다. 선조대에는 가을파지에 거주하는 여진인에 대한 회유책으로 관시(關市)를 개설하고 첨절제사진(僉節制使鎭)으로 승격되었다(『선조실록』 33년 1월 26일).

가을파지보는 위치가 계속 변하여 가을파지폐보, 구가을파지보, 가을파지보 등 세 곳이 있었으며, 이 가운데 가을파지폐보는 일찍이 폐지되었고, 연산군대 이후로는 구가을파지보와 가을파지보를 함께 경영하게 된다.

위치 및 용도

함경남도 삼수군 가을파지사(茄乙波知社)에 있다. 가을파지(茄乙波知, 茄乙坡知, 加乙波知, 加乙波只, 加乙坡知)는 갈파지(乫波知, 乫坡知), 가파지(茄波知, 加波地, 加波知), 가을파(加乙坡), 갈파(葛坡) 등 그 표기가 매우 다양하였다. 이는 조선초기 평안도와 함경도의 명칭에서 방언(方言)을 사용하여 지명을 정한 경우가 매우 많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개정 논의가 없지 않았으나, 유래가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이루어지지 않았다(『중종실록』 23년 8월 13일). 여기서 방언은 단순히 고려, 조선의 토착 방언을 의미하지 않고, 여진 및 몽고어를 포함하고 있다. 가을파지는 조선과 여진의 접경에 위치했는데, 이상의 다양한 명칭은 그 지역이 여진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의미한다. 가을파지라는 명칭은 평안도 강계와 함경남도 삼수에 걸친 산봉우리인 가을파지령(加乙波知嶺) 혹은 갈파령(葛坡嶺)으로 인해 붙은 것이다.

가을파지보는 폐사군(廢四郡) 지역과 인접하여 여진족의 약탈이 잦은 지역이었다. 또한 이곳에서 여진족과의 공식, 비공식적인 교섭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선조대 이곳에 관시(關市)를 열었던 것도 이 지역이 변경지대로서 긴장이 계속되었던 사실을 방증하고 있다.

변천 및 현황

가을파지보의 정확한 설치 시기는 알 수 없다. 1443년(세종 25) 9월에 세종이 여진족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도체찰사황보인(皇甫仁)에게 가을파지보를 조사하고 연대(煙臺)를 설치하도록 한 것이 확인된다(『세종실록』 25년 9월 20일). 1452년(문종 2) 4월 기사에 가파지(加波知) 농보(農堡)가 확인되는 점으로 미루어 정식으로 설치된 보가 아니라 농번기에 경작하는 농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활용하는 수호(守護)였음을 알 수 있다(『문종실록』 2년 4월 27일). 1500년(연산군 6) 2월에 축성사(築城司) 제조(提調)이계동(李季仝)의 건의에 따라 가을파지에 새로운 보를 축조하게 되는데 우선 목책을 두었다가 이후에 석재로 개축한 것으로 보인다(『연산군일기』 6년 2월 1일). 이때 설치된 가을파지보는 삼수군의 서북쪽 105리(약 41㎞) 지점에 위치했다.

연산군대에 설치된 가을파지보에는 병마첨절제사를 두었으나, 1511년(중종 6)에 삼수군으로부터 북쪽으로 90리(약 35㎞) 되는 지점으로 새로운 가을파지보를 쌓았는데, 이로 인해 이후에는 연산군대의 가을파지보를 구가을파지보(구갈파지보), 중종대의 가을파지보를 신가을파지보(신갈파보)로 부르게 되었다. 신가을파지보가 축조된 이후 이곳으로 첨절제사를 옮겨 두었으며, 구가을파지보에는 권관을 두어 관리하고 또 적을 방어하게 했다. 이 두 보는 함께 사용되다가 1895년(고종 32) 군무대신서리(軍務大臣署理)권재형(權在衡)의 건의로 신가을파지보의 첨절제사를 혁파하고 삼수부에 소속시키게 된다(『고종실록』 32년 2월 23일).

형태

가을파지보는 가을파지폐보, 구가을파지보, 신가을파지보 등 세 곳이다. 가을파지폐보는 삼수군의 서쪽 14리(약 5.5㎞)에 벽돌로 쌓은 성으로 둘레는 726척(약 220m), 높이는 7척(약 2m)이었다. 구가을파지보는 삼수 읍치(邑治)에서 서북쪽으로 105리에 위치한 석보(石堡)로 둘레가 1,575척(약 477.3m), 높이는 10척(약 3m)이었다. 신가을파지보는 구가을파지보에서 뒤로 물려 새로 구축한 것으로 읍치의 북쪽 90리에 위치하며 둘레가 3,500척(약 1,061m), 높이는 9척(약 2.7m)인 석보였다.

관련사건 및 일화

1594년(선조 27) 봄, 폐사군 일대에 거주하던 온하위(溫下衛) 여진인들이 가을파지를 침공했고, 인근의 감파보(甘坡堡)를 함락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제대로 된 대응을 하기 힘들었던 조선에서는 함경남도병마절도사최호(崔湖)의 건의에 따라 가을파지보에 여진인의 납관(納款)을 허락하게 된다. 이로써 폐사군과 인접하여 여진의 침입에 시달렸던 삼수군에는 일시적으로 침략이 그치게 된다(『선조실록』 36년 6월 4일).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만기요람(萬機要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